횡설수설

넋을 싫은 학춤

일릉 2017. 12. 31. 17:47

  덩더쿵 덩더쿵 마음에서 울여오는 장단소리에 오른발 왼발이 사뿐 사뿐 오르내리며 하얀 도포자락이 두팔을 음직일 때마다 땅에 달듯말듯 허공을 가른다. 무슨 한이 그리많은지 의슥한 여름밤 자정시간에 혼자서 조그마한 시골 학교 운동장을 무대로 삼아 너울너울 춤을 춘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쉴 줄도 모르고 돌고 또 돌면서 긴 한숨을 몰아쉬며 춤을 춘다.


  이 이야기는  내나이 40대 후반 안면도의 어느 시골 중학교에 근무할 때 있었던 일이다. 학교가 끝나고 옆관사에 기거하고 있는 나이가 나보다 조금 위인 선생님 두 분과 인근 바닷가인 백사장에 나가 술 한 잔 마시다 취중에 신세타령이 나왔던 모양이다. 술을 좋아하는 나는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술을 한 병 사가지고 백사장에 나가 밤바다의 더울 거리는 파도를 바라보며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고래고래 소리도 질러보고 엉엉 울기도 하다 밤이 이슥하여 관사로 들어가지 않고 옆에 있는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술이 덜 깼는지 운동장 가에 있는 푸라다 나스 밑 벤치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운동장 가운데로 걸어 나와 혼자 장단을 맞춰가며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 노래와 춤을 모르는 사람인데 어느 날 텔레비에서 본 학춤이 떠 올라 그이 흉내를 내며 덩실덩실 학춤을 추는 것이다. 오른발을 들었다 왼발을 들었다 오른손을 들었다 왼손을 들었다 고개를 좌로 돌렸다 우로 돌렸다, 또는 두 날개를 펼치고 운동장을 돌기도 하며 가슴에 매여 있는 한을 풀고 또 풀어 본다. 


  시골 가난한 농부 집 팔 남매 장남으로 태어나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공립학교 교사로 들어와 남보다 열심히 산다고 살아오면서 부모 형제들에게 효도하고 우애를 지키며 살아왔는데 내 인생의 복이 여기까지인지 나이 45세에 늦둥이를 하나 두게 되었다.


   1970년대 우리 사회는 전부터 내려오던 남아선호사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팔 남매 맞이인 나에게는 딸만 셋이 있었다. 아무리 전통이 뭐라 해도 신교육을 받은 나는 귀엽고 이쁘며 똑똑한 딸들이 자랑스럽기만 한데 집사람으로서는 그렇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아마 시부모 눈치가 보인 모양이고 장모님도 만날 때마다 은근히 아들 하나 낳기를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집사람의 나이가  40대이 넘어가자 임신이 되지 않아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 나이 45살이고 집사람 나이가 43일 때 갑자기 임신했단다. 나는 임신의 기쁨보다 어이가 없어 낙태하기를 권유하고 있었는데 병원을 다녀온 집사람은 아기가 아들이라고 낳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창피도 했지만, 아들이란 말에 귀가 솔깃했던 모양이다. 그동안 술자리만 안 지면 딸 셋이라고 "안타 하나 못 치냐"고 아들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놀려 댔는가. 이런 과정에서 태어난 아들이 우리 집 막내아들이다. 그 아이가 태어나던 날 집사람이 아이를 나 놓고 좋아서 자기 엄마와 시어머니 한테 엉엉 울면서 내가 혼자 힘으로 아들을 낫다고 하던 말이 귀에 쟁쟁하며 나보다 젊은 의사가 나를 보고 나이가 몇 살인데 아이를 낳느냐고 산모를 죽이려고 그러느냐며 핀찬을 주었다.


  이 아이가 태어나던 날 나는 직장에서 처음으로 연가를 사용하였다. 아이를 꼭 새벽에 출산하는 집사람은 이 아이도 새벽에 낳게 된 것이다. 밤새 병원에서 뜬눈으로 보냈기 때문에 아침에 교장 선생님에게 집 사람이 해산하여 오늘 하루 연가를 부탁한다고 하자 언제 소리도 없이 임신을 했었냐며 축하한다고 하면서 허락을 해 주셨다. 그다음 날 학교에 출근하니 축하 인사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직원회의 석상에서 교장 선생님이 김 과장이 어제 아들을 출산했다고 소개하자 70여 명의 직원들이 갑자기 환호와 손뼉을 치며 환호를 해 주었고 학교가 파하자 교장과 교감등 원로 선생님들이 정말로 축하한다며 술좌석도 베풀어 주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정상인이 아니고 다운증후군(일명 몽골리즘)이라는 돌연변이의 아이였다. 즉 염색체가 일반 사람과 다른 아이였다. 태어난 지 채 3개월이 안되어 정상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우리 부부의 갈등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다운증후군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어느 종합대학에 있는 도서관에 찾아가 심리학책과 교육심리학 책을 다 검토해 보니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말만 쓰여있다. 염색체의 종류에 따라 아주 지능이 낮은 지적장애인이나 고양이와 비슷한 얼굴형태라든지 일반인과 다른 성염색체가 있다는 등 모두 끔찍한 말만 쓰여있다. 희망이라고는 어느 염색체는 잘 가르치면 일상생활은 가능하다는 정도였다. 내 아이는 과연 어떤 아이일까? 고민하면서 방학이 되면 대구에 있는 영남대학에 가서 특수교육연수를 받으며 견문을 조금씩 넓혀 나갔다. 


  집사람도 반은 넋이 나간 사람으로 변하였다. 어떡하면 조금 더 나은 아이를 만들어 줄까 3살도 째 되기 전부터 특수교육을 받게 하면서 청주며 서울로 헤매고 다니지만,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이런 아이에 대하여 잘 치료하는 영한 약사가 있다고 처제가 소개했다며 나와 같이 약국을 찾아 가기를 원했다. 나는 염색체 이상을 약사가 어떻게 고치냐며 반대 했지만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약사 하는 말이 미꾸라지를 물에 익혀 통째로 먹이란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집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그 말을 따라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가정생활이다 보니 그동안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던 딸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6학년을 다니고 있는 딸들에게 마음을 줄 여유를 갖지 못한 것이다. 부모의 얄팍한 마음은 딸들이 아빠 엄마의 갈등을 이해할 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양가의 큰아들과 큰딸이였던 우리에게 부모님들도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고 동생들도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하긴 장애아이를 둔 부모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대학을 나와 선생깨나 한다는 사람들도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던 사회가 아니였던가?


  우리나라에 특수아동에 관한 각종 법률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 내 아이가 태어난 후 2~3년 뒤부터 제정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생활 속에서 중학교에 막 입학한 막내딸에게 신경을 써 주고 싶어 그 아이 학교로 전출을 갖더니 이 녀석이 성격이 내성적이라 저희 아버지와 같이 학교생활하는 것이 부담이 같은지 성적이 떨어졎다. 나는 1년만 근무하고 천안 시내 학교에 3년이라는 근무 기간을 남겨놓고 교장, 교감 및 여러 선생님이 말류 하는데도 태안으로 전근하여 학교 관사에서 손수 밥을 꿇여 먹으면서 3년째가 된 것이다.


  어쩌다 술 한잔 마신다든지 가정 이야기만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눈에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내 마음을 달래는 방법은 스스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면서 우리 가정에 행복을 찾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 또다시 폭발한 모양이다.  


  덩더꿍 덩더꿍 마음의 장단을 맞추며 자기 입으로 "의싸 좋다" 춤사위를 너면서 중천에 있던 둥근달이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한숨을 몰아쉬며 운동장을 돌고 또 돈다.


'횡설수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년 시절  (0) 2018.01.04
Adieu - 2017년아! 이제는 하나의 추억 속으로  (0) 2017.12.31
지난 날의 나의 집  (0) 2017.07.03
쇠무릎  (0) 2017.06.29
두대바리와 멍청이 부부  (0) 2017.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