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이 지나도록 나에게 존함이 기억되는 선생님이 몇 분 계신다. 특별히 학생 관리를 잘 해 주셨던 담임 선생님 몇 분과 수업 시간에 열정이나 친절로 인해 기억되는 분, 특별히 인기가 있었던 분, 또는 너무 엄하거나 친절했던 분들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점 사라져 지금까지 존함을 기억하는 분은 몇 분 안 된다.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분들은 내 인생에 그만큼 영향을 끼친 분으로 생각되어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본다.
많은 선생님 중 수업도 한 적이 없으며 나와 특별한 관계가 없었던 교감이셨던 임무성 선생님이시다. 1960년대 초 금산동중학교를 다닐 때다. 내가 다닌 학교는 금산 농업고등학교와 병설학교 이였다. 교장 선생님은 점잖은 신사분으로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가나 존함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뒤에 전라북도 교육감까지 하셨다는 것을 보면 유명한 분 이였나 보다. 그러다 보니 실외 조회 시간에 교감 선생님이 가끔 훈화하신 거로 기억된다. 중학생인 내가 본 교감 선생님은 근엄하고 엄격하셨다. 조회 시간에 훈화하는 데 학생들이 떠들고 장난을 찾나 모르지만, 사람은 상대방에게 이를 보이면 안 된다고 훈화를 하셨다. 이빨을 보이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정신 이상자는 늘 해하니 웃음을 웃고 다닌다는 것이다. 아마 떠드는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 하신 말씀이시겠지만 나는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겨들었다. 지금까지도 이야기할 때나 길을 걸을 때 입을 벌리는 일은 없다. 그리고 TV에 나오는 사람이나 차를 타고 가면서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는 경향이 나타났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자기 이빨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하류계층으로 내려올수록 필요 없는 웃음과 이를 보인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누가 무어라 해도 오늘날 나를 만들어 준 분은 공의창이란 선생님이다. 1960년으로 기억한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을 다닐 때 사회를 가르치던 분으로 내 인생에 너무 많을 영향을 주었다. 이 분은 경상도 분으로 푸짐한 대구지방 말씨를 사용 했는데 수업도 너무나 재미있게 하여 그분이 설명해 주었던 내용을 오랫동안 기억하여 내가 교단에서 사회를 가르치며 그대로 인용하기도 했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중학교 사회 교과는 1학년은 지리, 2학년 역사, 3학년 일반사회(공민)로 알고 있다. 선생님은 역사를 가르치던 분으로 국사나 문화사를 이야기체로 가르쳐 학생들이 흥미를 유발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지금도 선생님이 이야기 해 주신 '클레오파트라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는 동안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은 공의창 선생님 한 분으로 기억된다. 학교도 일찍 들어간 데다 공부도 썩 잘하지 못하고 가정생활도 어려웠으니 옷은 남루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칭찬받을 일이 없었을 것 같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시절 사회 시간에 공의창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된 것이다. 키도 별로 크지 않아 앞에서 둘째 줄 복도 쪽에 앉아 있는 데 칠판에 쓰여 있는 내용을 필기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교실을 한바 귀 돌아보시다 내 옆에 서시는 것이다. 그러더니 내 노트를 집어 들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글씨를 김복희와 같이 큼직큼직하게 쓰라"고 하시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에는 글씨를 크게 또박또박 쓰라고 지도하시며 내 노트를 보여준 것이다. 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난생처음 듣는 칭찬이었을 것이다. 가정이 어렵다 보니 집에서도 매일 동생들을 잘 못 본다고 혼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가 하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집에서는 꼴머슴으로 소를 책임지고 있다 보니 제대로 못 한다고 두대바리라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어 왔다. 그런 나에게 선생님이 칭찬해 주셨으니 얼마나 황홀했을까?
분명 글씨를 잘 쓰지 못했다. 잘 쓰지 못하니 크게 쓴 것이다. 여하튼 칭찬은 칭찬이다. 이런 나는 오늘날까지 글씨가 엉망이다. 나에 가장 단점의 하나가 글씨체인데 그 이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기 위하여 벼락공부를 하면서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오감을 이용한 공부법을 선택하면서 글씨체가 엉망이 된 것이다. 즉 학습 내용을 쉽고 빠르게 기억하려면 단순히 눈으로 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고 읽은 소리를 귀로 듣고 생각하면서 손으로 써 보라는 갓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암기하는 데는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책을 눈으로 읽으면서 한 손으로 연습장에 생각하면서 내갈기는 공부 방식을 근 2년 가까이 하다 보니 글씨가 엉망이 되었다. 이렇게 변한 글씨는 교단에 있으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내 갈겨쓰는 습관을 지금까지 버리지 못한 것이다.
공의창 선생님은 초여름 어느 날 학생들이 조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수업을 멈추고 자기가 고등학교 시절 공부했던 추억담을 들여 주셨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몸이 아파 2년간 휴학을 했다 복학한 다음 휴학 기간에 떨어진 공부를 만회하기 위하여 밤잠을 줄이고 공부했단다. 이처럼 밤잠을 줄이려면 물을 먹지 말아야 한단다. 물을 많이 마시면 위가 팽창하여 잠이 많이 온단다. 밥을 먹고 나면 춘곤증이 나타나는 현상이란다. 그래서 물을 많이 먹지 않으려면 음식을 먹을 때 맵고 짠 음식을 피해야 한단다. 그러면서 '너희들도 고등학교에 가서 대학을 준비할 때 사용해 보란다' 나는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둔 모양이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그만두고 2년을 쉬었다가 다시 1학년으로 복학했다. 중학교 2년 후배들하고 학교를 같이 다니고 있었지만, 집안일을 돕다 보니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나에게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1년 동안에 내 키가 18cm나 크면서 몸도 불어 3학년에 올라갈 때는 키가 큰 학생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전과 같이 부모님 말씀에 맹종하지 않았다. 늘 바쁜 집안 일손을 돕지 않고 대학을 진학하겠다고 공부한다며 책상에 앉아 있는 일이 많아 젖다. 그러다 부모님에게 꾸지람을 들으면 집에서 나와 친구 자취 집에서 생활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났다. 농사일하지 않고 대학을 나와 고급 공무원을 하다 유능한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원래 어려워 대학에 원서조차 내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손수 1년 하숙비를 벌게 되자 다시 대학에 도전하겠다고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중학교 2학년 때 공의창 선생님이 들여 주신 이야기가 떠 올라 실천한 것이다. 잠을 3시간 반으로 줄이기 위하여 밥의 양을 줄이고 맵고 짠 것은 일절 먹지 않았으며 물은 거의 먹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잠은 3시간 반을 자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나 넓죽했던 얼굴은 뾰족해 젖고 고등학교 시절 덩치가 제일 좋아 힘이 가장 좋은 사람이 맡는 럭비선수 1번 번호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177.5cm 키에 60kg도 나가지 않는 깡마른 사람으로 변하였다. 어떤 때는 57kg까지도 떨어져 빈혈이 나타나는 사람으로 변한 것이다.
1969년 7~8월은 무척이나 더웠다. 그때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데 그 무더운 여름 더위에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런 내 체격은 교원 생활을 하는 동안 계속되어 교사 시절 몸무게가 60kg 이하일 때는 주당 35시간 가까이하는 수업이 힘들기도 했다. 그러나 60kg이 넘어가면 열정적으로 수업에 임하였다. 그런 몸무게가 교감이 되고 나니 마음은 부대껴도 몸은 편한 것인지 65kg 정도로 불어나더니 교장이 되니 67kg까지 늘어났다. 그러다 퇴직 후 70kg을 돌파하여 75kg까지도 늘어났으나 요즘은 운동과 활동량을 늘려 절대로 73kg을 넘기지 않고 72kg 정도로 유지하고 살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마시지 않던 물도 가능한 자주 마실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이다.
오늘날 나의 사회적 지위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도 아니지만, 존함을 잊을 수 없었던 공의창 선생님이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들여 주셨던 자기 고등학교 시절 공부했던 방법을 기억했다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교사 시절이나 관리직에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종종 공의창 선생님 이야기를 들여주며 내가 공부했던 방법을 들여 주기도 했다. 그 결과 3년 전에는 30년 전 중학교 여자 제자가 동창회에 나를 보기 위하여 수원에서 참석했는데 직장에서 일이 있어 회의에 늦게 참석해 보니 내가 먼저가 아쉬웠다며 전화가 왔다. 그 의 전화 내용이 자기가 중학교 3학년 때 내가 들여 준 이야기가 너무 생생하여 자기도 실천하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수업 시간에 내가 좌우명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내 인생 좌우명이 <솜같이 살자>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단다. 내가 솜같이 살자고 좌우명을 정한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거부하지 말고 솜같이 따뜻하게 감싸주자는 뜻이었다. 즉 총알도 솜은 떫지 못한다며 예수님의 오른쪽 뺌을 때리면 왼쪽 뺌을 대 주라는 말뜻은 상대방이 스스로 느껴 깨닫게 만들어 주라는 뜻이라며 솜같이 살자는 의미도 나의 인격체를 높일뿐더러 상대방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자는 의미라고 수업 시간에 들여준 적이 있었는데 이를 감명 깊이 들었던 모양이다.
공의창 선생님 감사합니다. 지금 살아계시면 아마 90대 후반이나 100세가 넘었을 것 같은데 중학교 2학년 코흘리개가 이제는 머리가 백발이 되어 선생님의 칭찬과 들여 주셨던 학창시절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고마움을 표현해 봅니다. 너무 멋진 선생님 구수한 경상도 말씨에 늘 다정다감했던 선생님 모습 마음속으로 회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