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걷기 위해 사는 인생

일릉 2016. 6. 11. 21:11

오늘은 새벽 일찍 산책을 하면서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 걷기 위해서 사는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지리산 등산로에서 제일 험하다는 피아골 계곡을 새벽 일찍 천안에서부터 차를 몰고가 8시간이나 산행을 하고 와서 늦잠도 잘만 하건만 매일 2시간 씩 하는 걷기를 위하여 새벽 5시에 산책을 나섯으니 그럴만도 하다.

직장에서 퇴직을 한지 벌써 6년이 지나고 7년째가 되었는데 딱이 할 일도 없어 취미 생활로 농작물 가꾸기를 한다고 하고 있으나 그것이 내가 사는 이유는 될 수가 없을 것 같다.


퇴직을 하기 2년전부터 퇴직 후 노후 생활을 위하여 골프를 배운다고 하였으나 그도 한 6~7년 치고보니 그리 즐거운 생활이 될 수가 없었고 건강에도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작년 12월부터는 접어 버렸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동안 "살기위해 먹는 거냐, 먹기위해 사는 것이냐"고 논쟁을 하던 시절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이 떠오른다. 그러다 중학교 시절에는 위대한 과학자가 되겠다고 떠벌리기도 하였으며 고등학교 시절에는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 노벨 문학상을 탈 수 있는 문예인이되겠다고 글을 쓴다고 까불다가 가난에 학교를 그만 두고 집에서 일을 하면서 생각한 것이 왜 우리나라는 이리도 못사는가? 그 이유는 정치를 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내가 위대한 정치인이 되어 모든 국민이 잘 살게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도 꾸었다.

그러다 조금 철이드니 나를 깨닺게 되었다.


내 현실과 능력에 맞는 직업이 무엇인지?

내가 살고 가족을 먹여 살여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생각지도 않은 교직에 들어와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또래들 보다 5~6년을 늦게 교직을 시작하였는데도 교감 교장까지 승진도 하여 학교를 경영 하면서 학생과 교사가 중심이 되는 학교를 만들기 위하여 가는 학교마다 새로운 바람도 일으켜 봤다.


이렇게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서는 열심히 살은 인생인데 막상 퇴직을 하고나니 공허함을 느낄 수 빆에 없었다.

그런 공허함을 막기 위하여 시작한 것이 농산물 가꾸기로 삽 한자루와 괭이 한 자루로 600여평의 땅을 일구며 이것 저것 재배한  작물의 가지 수가 30여 종이나 되었다.

농기구도 없이 시간을 보내기 위한 농법이니 생산물에 대하여 신경을 쓰는 것도 안이요 잉여 농사물을 내가 사는 아파트 같은 라인 현관에 가져다 놓고 드실분은 가져다 드시라고 종이에 '이 농작물은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농산물이니 필요한 만큼 가저다 드시기 바람'이라고 적어 놓으면 언제 없어졎는지 모르게 없어지는데 흐뭇함을 느껴보기도 하고, 어쩌다 마눌님이 몇 푼 받고 아는 분들에게 팔아 오면 신기도하였다.


그런 생활 2년차 해보지 않은 일에 열중하다보니 어느날 허리에 고장이나 병원을 찾은 결과 척추협착증에다 디스크 파열이란다. 디스크 파열이란 말에 겁을 잔득 먹고 수술을 받으라는데 겁이나 시술로 대신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오히려 척추가 옆으로 구부러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부러진 허리를 펴기 위해 한방에서 침과 물리치료를 받아도 보고 척추 교정원도 다녀 봤지만 차질이 없어 결국 수술을 받게되었다. 허긴 치료를 받아 허리가 도라오면 또 운동을 한답시고 허리를 혹사 시켰으니 척추가 제자리로 돌아 올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뒤에서 깨달았다.

수술을 받은 후 의사에게 허리를 강하게 하는 방법을 물어보니 걷기 운동을 하라고 하였다. 나는 다시는 허리가 구부러지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하여 열심히 걷기 운동을 하였다. 수술 받은지 2년 반이 다 되었지만 아마 일만보이상 걷지 않은 날이 5일도 않될 정도로 열심히 만보 이상 걷기를 하였다. 심지어 해외 여행을 가서도 새벽에 걷기를 하였으며 해외에 있는 딸내집에 가서도 아침 저녁으로 걷는데 시간은 보낸 것이다.


원래 시골에서 태어 낳고 내가 다닌 초등학교와 중등학교가 2km가 더 떨어진 학교를 다녔으며 중학교 1학년 때부터는 꼴머슴에 나무도 해 날으는 나무꾼 노릇도 하였으니 걷는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초, 중학교 시절 동생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학교에 제출하던 그네들 호적초본은 20km나 떨어진 고향에 걸어가서 내가 떼어다 주던 실력이니 걷는 것은 달인은 아니지만 누구에게 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학을 가겠다고 공부를 시작하고 학교라는 곳에서 평생 직장을 가지고 근무하면서 말년에는 10여년이 넘게 관리직에 종사했으니 언제 걸어 봤으라.

막상 정년이 되어 퇴직을 하고 나니 비리비리 갈비시에 곡괭이질 한 번 하면 쉬어야 하고 삽 질 한 번 하면 쉬어야하는 애숭이 농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고집 세게 내 인내력을 테스트 해 보겠다고 어렸을 때 부모님들이 하던 걸 눈 넘어로 보아둔 실력으로 콩과 깨 농사를 지어 도리깨질도 하면서 사는 인생이 신기도 하고 나름의 재미도 있었지만 결국은 쓰러지고 만 것이다. 

2014년 4월 어느 날 새로 흙을 돗은 밭에 거름을 내기 위하여 손수례 60여 차례나 밀고 다니다 거의 마지막 쯤 되었는데 거름을 손수례에 퍼 올리다 '아이쿠' 하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후 한방병원에서 침을 맞으며 일은 계속되었으나 어느날 풀을 매다 다시 그 자리에 주져않자 전문 척추전문병원을 찾은 결과 척추협착증이 있는데다 디스크가 파열되었다는 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하루 만보 걷기가 생활화되면서 만 1년이 지나니 허리에 힘이 생겨 농사일은 말할 것도 없고 등산 하는데도 50, 60대 때보다 힘을 들이지 않고 산행을 하였다. 이에 재미가 난 나는 금년부터는 매일매일 걷는 걸음 숫자를 책상 달력에 기록을 하고 토요일이면 통계를 내어 1월 1일부터 걸은 걸음 숫자가 매일 기록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 만보이상 걷는 것은 놓치지 않았다. 새벽이든 낮이든 하루에 2시간은 꼭 걷는 것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


퇴직 후 내가 왜 사는가?

더 살 가치가 있는가? 

그저 밥만 치우는 노년의 인생이 인생인가? 하는 의문을 종종 같게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하던 중 문득 내가 지금 사는 이유는 걷기 위해 사는 것이 않인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아이들도 다 커서 분가해 나갓으며 직장에서는 나이가 만타고 좃겨났고 늙어가는 두 늙은이 얼굴만 바라보며 사는 것이 인간이 사는 의미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런 와중에 매일매일 쉬지않고 걷기에 몰두하다 보니 내가 사는 이유가 걷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않인지 하는 생각이 들며 오로지 걷기만을 위하여 사는 느낌을 받게된 모양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걷기만을 위하여 사는 인생도 나름의 즐거움이 않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죽는 그날까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기 위하여 걷기만 하는 인생 목표도 나쁘지만을 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며 남어지 내 인생 목표는 걷기만 하다가 죽는 것으로 정하였다.


  천안 광덕산의 봄

 지리산 피아골의 여름

       지리산 화엄사 계곡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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