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행복과 사랑이 아닌가 생각된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툭하면 인사말이 행복하시라고 하는데 막상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쉽게 정리가 안되어 생각을 한 번쯤 해봐야 대답이 나오는 말이다. 이런 행복과 같이 사랑이란 말도 입에 붙어 있지만, 막상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이란 말을 철이 들면서부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지만, 과연 나는 누구를 얼마나 사랑했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더구나 사랑이란 용어는 광범위하여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형제 간의 사랑, 남녀 간의 사랑, 더 나아가 친구 간 사랑, 사제 간 사랑, 이웃 간 사랑, 민족 사랑, 국가 사랑 등 그 범위는 이루 말할 수 없게 넓다.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다양한 사랑 중에서 이성 간의 사랑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 인간은 나이에 따라서 감정도 달리 나타나는 것 같다. 청소년 시기 및 청장년 시기와 노년의 시기에 따라 이성 간의 감정에 변화가 오는 것 같다. 청소년기는 누구를 좋아한다고 생각되면 앞뒤 분간을 못 하고 덤비는데 장년기나 노년기가 되면 좋아한다고 밤잠을 설치지도 않고 무덤덤하게 지낸다고나 할까? 분명 감수성이 무뎌지는 모양이다.
내가 이성에 눈을 뜬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가정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2년간 일을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느낀 것 같다. 나는 원래 큰아들이다. 바로 밑에도 남동생이며 8살에 고향을 떠나 친척들과도 멀리 떨어져 살았다. 그리고 외갓집에 이모들이 많이 있었지만, 외할아버지가 엄하여 외갓집에도 잘 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 주변에는 어머니 외에 여자가 없었다. 이런 환경이 누나가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한 것 같다.
아마 내 나이 17살 때로 기억된다. 어느 여름날 20km 정도 떨어진 큰집에 갔었다. 큰집에는 나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난 사촌 누나가 있고 두 살 아래인 사촌 동생이 있다. 어느 날인가 누이동생 친구인 그 마을의 아가씨를 봤는데 그렇게 이 뿔 수가 없었다. 나는 체면을 무릅쓰고 그녀 이름을 물어보고 만날 수 없냐고 소개를 해 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누이나 그 여자아이는 15살 먹은 것이다. 누이는 "얼레에 꼴레" 하며 놀린다. "ㅇㅇ 오빠는 누구를 좋아한다네"하고 놀리기만 했다. 그 아가씨는 위로 오빠가 둘이 있으며 부모님이 안 계시고 할머니와 오빠 두 사람과 같이 살고 있었다. 큰 오빠는 사촌 형과 친구라 나도 형을 따라 그 집에 놀러 간 적도 있었다. 이 아가씨를 본 다음 몇 일간 밤잠을 설치다 결국 소개를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살다 보니 기억 속에서 살아진 이 아가씨가 나에게 처음으로 이성의 싹이 튼 아가씨로 기억된다.
그리고 두 번째 아가씨는 2년 동안 집안일을 해 주다 다시 학교에 복학하여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다시 학교에 복학한 나는 가난한 농촌을 잘살게 만들어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앞으로 유능한 정치인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 강인한 정신력을 키우기 위해 웅변 연습도 하면서 학교 럭비부에 들어가 유니폼을 억 개에 메고 제법 거들먹거리던 때였다. 이런 꿈을 가진 나는 농촌 계몽운동과 사람들을 많이 사귀기 위하여 마을에 꿀벌 4-H를 조직하여 5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1965년에는 대통령에게 격려 편지를 부탁하여 친필인지는 모르지만, 청와대에서 대통령에게서 온 편지라며 우리 집에 배달되기도 했다. 이때 나는 더 많은 친구를 사귀기 위하여 이웃 마을에까지 4-H를 만들도록 계몽한 다음 금산읍 4-H 연합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았다. 그때 우리 집에서 조그마한 산 하나를 넘으면 상지말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 4-H 회원이며 금산군 4-H 연합회 총무를 맡으면서 금산읍 4-H 연합회 총무를 맡은 양희옥이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나와 같았으며 학교는 내가 2년 쉬었기 때문에 1년 선배가 되는 아가씨였다.
이 아가씨는 얼굴도 예쁘고 야무져 금산읍 농촌지도소에서 금산군 4-H 연합회 일을 보면서 직원들 일도 거들어주는 사원 일도 맡고 있었다. 우리 마을에 4-H를 만들고 금산읍 연합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농촌지도소를 뻔질나게 들랑거리던 나는 자연히 양희옥이란 아가씨와 가까워졌다. 더구나 금산읍 연합회 회장을 맡은 나는 실무를 맡은 희옥이란 아까씨와 자주 접할 수뿐이 없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3학년 때 추석으로 기억된다. 상지말 4-H 회장의 초대가 왔다. 자기 마을에 4-H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마을 윷놀이를 한다고 읍 연합회 회장도 좀 참석해 달란다. 나는 우리 마을 회원 한 사람과 같이 참석했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열심히 지어놓은 아버지의 한복을 꺼내입고 그 마을에 나타났다. 학생이 한복을 입고 나타났으니 다른 사람들 시선을 끌만도 했다. 시작할 때 간단하게 축사 한마디 하고 윷놀이도 하는데 두 팀을 이기고 세 번째는 다 이긴 게임을 마지막 패 한 번 잘못 써 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어느 아이가 내 옷자락을 끌면서 희옥이 누나가 보잖다고 희옥이네 집으로 데리고 갔다. 친구와 같이 그 집을 가 보니 대문이 반듯하고 제법 큰집에 살고 있었다. 어른들은 가을 추수 하루 나가시고 자기 혼자 집을 본다면서 먹을 음식을 차려 줬다. 친구와 나는 웃어 가며 즐겁게 먹고 어른들이 보면 혹시 오해할까 두려워 조금 머무르다 집으로 왔다. 이렇게 대접을 잘 받고 놀다 왔는데 그날 저녁 한가위 달이 휘 둥굴 한 밤에 마을 앞 강변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그리움이 솟구친다. 낮에 초대해 주었던 희옥이란 아가씨가 보름달 모습같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분명 낮에 만났는데 왜 그리 보고 싶은지 알 수가 없다. 문득 머릿속에 스쳐오는 것이 있다. 이것이 사랑인 모양이구나. 사랑하면은 보고 또 봐도 보고 싶다더니 낮에 만나서 음식을 먹으면서 대화도 나누고 했는데 몇 시간 지난다고 보고 싶어 안달이 나니 왼 일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분명 큰집에 갔을 때 본 아가씨와 내 마음에서 오는 감정이 달랐다. 처음 아가씨는 그저 이뻐서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면 희옥이란 아가씨는 무어라고 할까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아마 그녀가 나를 초대해 준 것이 나를 좋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아가씨는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그해 겨울 결혼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20살도 안 되었는데 결혼한 것이다.
내가 첫 데이트를 한 여자는 뒷마을에 사는 아가씨였다. 십 대 후반 쾌나 까불 때다. 겨울 농촌에는 긴긴밤에 할 일이 없으니 친구들끼리 어울려 이 마을 저 마을 휩쓸리며 돌아다닐 때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남자라면 데이트할 여자 한 사람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다.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마을은 누가 제일 예쁘고 또 누가 예쁘다고 떠들어 댈 때다. 어느 날 친구 몇 사람이 어둥굴이라고 하는 뒷마을로 놀러 갔다가 우연히 길에서 두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다. 친구들이 그들을 놀리자 그들은 부리나케 도망가는데 내 모습에 아가씨들이 참하게 보였다. 친구들 말로는 그 마을에서 그녀들이 제일 예쁘단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인데 학교를 늦게 다녀 초등학교로는 한참 후배가 되는 처녀들이었다. 친구 한 녀석이 한 아가씨를 찍는다. 나도 역시 한 아가씨를 선택했다. 그 아가씨 이름이 옥분이다. 이 아가씨는 오빠가 한 사람 있는데 나이는 나보다 두 살이나 위이면서 학교는 일 년 후배였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재수할 때다. 그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고있는 아가씨로 그 마을에는 남자나 여자나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도 진학하지 않고 농촌에서 가정 일하는 사람들만 있었다. 그러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만나자는 것이다. 그러든 차 저녁에 내가 기거하고 있는 인삼밭으로 친구와 같이 찾아 왔다. 나는 대학을 가기 위하여 재수하던 때였다. 공부하기 위하여 진악산 자락에 있는 인삼밭에 움막을 지어 놓고 인삼밭을 지키기 겸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고자 혼자 숙식을 하면서 살고 있을 때다. 계절이 초여름쯤으로 생각된다. 겁 없는 시골 아가씨들이 개울에서 가재를 잡겠다고 낡은 고무신짝을 들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갑자기 처녀들이 찾아오니 오히려 내가 당황하였다. 원래 나는 여자들을 거들떠보지 않고 있을 때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책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읽고 있었다. 바로 연애는 책에서 다 한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던지 톨스토이의 부활, 쿼바디스, 철학책인 소크라테스의 변명까지도 읽는 독서광이다 보니 유치한 시골 처녀들과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속에 내 결혼 상대 여성은 이화여대는 나와야 한다는 사고의식이 머릿속에 꽉 박혀 있었다. 다만 이 아가씨에게 편지를 쓴 것은 친구들과 장난으로 해 본 것인데 정말로 찾아 왔다. 별수 없이 그녀를 따라나서 생전 처음으로 고무신으로 횃불을 만들어 가재를 잡아 보았다. 그녀들이 사는 마을이 바로 진악산 자락이라 더러 잡아 본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알게 된 옥분이란 아가씨와 첫 데이트를 해 봤다. 어느 날인가 저녁에 집에 있는데 우리 아랫집에 사는 아가씨가 나를 보잔다. 우리 집이 높을 곳에 있어 싸리문을 열면 앞집 장독이 눈 아래로 보인데 뒷마루에 있던 앞집 아가씨가 나를 보고 손짓을 한다. 자기 집에 옥분이가 와 있으니 만날 거냐는 것이다. 나는 집안을 살펴보고 좋다고 했다. 그 시절은 남녀가 이야기하는 것이 다른 사람 눈에 띄면 큰일 나는 것으로 알고 있을 때다. 부모 몰래 집을 나와 그녀랑 족히 두 시간은 데이트를 한 것 같다. 그녀 마을이 우리 마을에서 1.5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금산읍 장동이란 마을에서 읍내 가는 신작로를 걷고 다시 윗 어둥굴까지 바르다 주었다.
여자들과 접해 볼 기회가 없었던 나는 무척이나 수줍음을 타고 있었다. 더구나 낮도 아니고 달빛이 환한 보름날 단둘이 이야기를 나눠 본 것은 처음이다. 친구들과 어울려서는 쾌나 큰소리를 첮지만 사실 숙맥이다. 남들은 데이트하면 팔짱을 낀다든지 손을 잡고 한다는 데 나는 그녀와 최소 1m 정도 거리를 두고 보름 달빛을 받으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르지만, 가슴이 쿵쿵거리면서도 즐거운 데이트를 한 것이다. 너무나 기억이 생생한 데이트라 50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는데도 걷든 모습이 생생하다. 그 후 나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마음속에 나의 상대 여자는 최소한 대학은 나와야지 하는 생각과 대학을 가기 위하여 바빴으며 또 한편으로는 나를 좋다고 만나자고 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뒤에 알고 보니 그녀와 데이트 한 것이 동네방네 다 소문이나 우리 부모님들도 알고 있었단다.
그리고 단 4시간 열차를 타고 가면서 만난 잊히지 않는 아가씨가 한사람 있다. 1967년도 12월로 생각된다. 서울 신촌 로터리에 있는 독서실에서 생활하다 대학 원서를 쓰기 위하여 금산을 왔다 간 적이 있다. 내가 원서를 쓰려 금산에 내려간다고 하니 친구 둘이 자기네 집에 들여 겨울 코트를 가져다 달란다. 1960년대 대한민국은 무척이나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라 시골의 청년들은 틈만 있으면 서울로 올라갈 때다. 한 친구는 나와 같이 대학을 가기 위하여 공부하는 친구고 다른 친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대문 근방에서 자그마한 전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코트를 들고 가는 나에게 이모님이 자기 아들을 데리고 오란다. 나는 그때 이모 집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아침에 도시락 두 개를 싸서 도서실에 가 자면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이모는 큰아들이 6살 정도 먹은 아이인데 저희 할아버지가 계신 금산에 내려가 있었다. 그 동생을 내가 오는 길에 데리고 오라고 하여 데리고 나선 것이다.
지금은 교통이 발달하여 금산에서 고속버스를 타면 직접 서울을 올 수 있는데 그때는 금산에서 버스를 타고 대전에 와서 대전에서 열차나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차비를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은 대전에서 열차를 타고 가는 방법이다. 시외버스는 열차 요금의 두 배가 된다. 그리고 6살 먹은 아이를 따로 좌석표를 끊는 것이 아니고 내 무릎에 앉히고 차를 타던 때다. 대전에서 서울 가는 시간은 열차나 직행버스 모두 4시간이 소요되었다. 다만 열차는 대만원이라 사람들이 통로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이 만원이지만 가격이 비싼 직행버스는 한가하나 천안에서 한 참 쉬었다 가는 것이 달랐다.
나는 좀 편하게 가고자 대전 역 앞에 있는 직행버스 터미널로 갔다. 서울을 가는 버스는 중간 지점인 천안에 가서 30분 정도 쉬었다 간다. 더욱 빨리 가려면 천안에 가서 갈아타면 30분을 절약할 수 있어 천안까지 가는 버스표를 끊고 이종 동생을 자리에 앉혀 놓고 화장실에 갔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화장실을 막 들어서는 데 입구에서 야바위꾼들이 책상 위에 컵 세 개를 업어놓고 주사위를 감추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다 수사 위 감추는 것을 목격한 나는 주사위가 들었다고 생각되는 컵을 가르치며 여기에 있다고 하자 돈을 걸란다. 돈 3,000을 걸으면 손목시계를 준단다. 시계가 없던 촌놈인 나는 시계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있던 돈과 친구 외투를 맡기고 내기를 했으나 속은 것이다. 만약 맞추었더라도 그들 일행만 있는 곳에서 컵을 그대로 두고 차에 가서 외투를 가져오는 우를 범했으니 얼마나 순진하고 얼이 섞은 촌놈이었는가 웃음이 절로 나온다. 결국, 돈을 다 털린 나는 버스비를 물려 기차역으로 갔다. 대전에서 천안까지 시외 버스비는 대전에서 서울까지 열차비라 열차를 타기로 한 것이다. 이 열차 안에서 미모의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다.
열차는 대 만원이었다. 혼자 같으면 문가에 타면서 역마다 멈추어 슬 때 바람이라도 쬐는데 아이를 데리고 가는 입장이라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어떤 곳은 두 사람이 타는 좌석에 세 사람씩 끼어 타고 가는데도 통로에 사람이 꽉 차 음직이기도 불편하였다. 나는 동생과 같이 어느 아가씨가 있는 앞으로 갔다. 동생을 의자와 의자 사이에 세우고 내가 붙잡고 등으로 밀리지 않도록 버티고 있었다. 넉살 좋은 꼬마 녀석이 나에게 응석을 부린다.
"형 우리도 앉자 가"
"자리가 없잖나?" 하니
앞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벌떡 일어나면서 나보고 앉으란다. 나는 점잖게 사양을 하고 그러면 무릎에 동생 좀 부탁드린다고 부탁하며 동생을 맡기었다. 동생만 맡겨도 한결 부드러웠다.
대전에서 사기를 당한 나에게 열차 안에서는 행운이 따른 모양이다. 바로 아가씨 앞에 앉자 가던 사람이 수원에서 내려 내 자리가 생긴 것이다. 자리가 생겨 동생을 받아 무릎에 안치고 이야기를 할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이 아가씨에게 말을 걸어 본다. 어데 사시느냐고 물어보니 고향은 전라북도 고창인데 지금 사는 곳은 서울 구로동에서 일을 하고 있어 대구에 갔다가 오는 길이란다. 아마 영등포 구로 공단에서 일하는 아가씨인 모양이다. 우리나라 1960년 대는 공장에 취업하는 것도 사회적 배경이 있어야 들어가던 때였다. 나이를 물어보니 19살 이란다. 나보다 한 살 어렸다. 이름은 '곽선희"란다. 선희는 내 사촌 형 이름인데 하면서 머릿속에 박힌다. 그는 나와 동생에게 컴을 하나씩 주는데 그 껌은 내가 생전 처음 씹어보는 미국제품인데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운 것이 입안에서 살살 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후 나는 이렇게 부드러운 껌을 씹어 본 적이 없다. 껌을 씹으면서 대학을 가기 위하여 공부하는 학생으로 이종동생을 이모 집에 데리고 가는 길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다 보니 지루한 줄도 모르고 영등포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영등포에서 내리는데 나도 같이 따라 내렸다. 서울역까지 가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돈이 하나도 없어 시내 버스비를 구걸해야 할 신세가 된 것이다.
열차에 내리면서 그녀에게 대전에서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말하고 버스표 한 장만 부탁드렸다. 내 호주머니에 단돈 15원이 없어 자존심을 무릅쓰고 사정 한 것이다. 만약 이것이 안되면 버스 안내원에게 사정을 하여 무임승차를 해야 할 판이다. 그녀는 측은하게 보였는지 버스표 3장을 주는데 두 장은 돌려주고 그의 주소를 물어 적었다. 대학 시험이 끝나면 연락을 해서 버스표를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해 운이 없었나 실력이 부족했나 대학에 낙방하고 말았다. 대학 시험을 볼 때 친구들의 외투 건이 문제가 생겨 시험에 몰입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 젖으며 얼마 후에 대전에 들렀을 때 야바위꾼들을 다시 만나 내가 걸은 돈을 지급하고 외투를 찾아 해결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 아가씨와 연락할 기회를 놓치고 금산에 내려와 살면서 마음속에 깊게 묻어버린 고창이 고향인 곽선희라는 이름을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얼굴이 동글동글하며 참 예뻤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고 있는지 여자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다.
그래도 가장 긴 시간 정이 들었나 모르지만, 알고 지낸 아가씨는 신영자라는 아가씨다. 이 아가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알게 되었다. 어느 여름 토요일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데 아가씨들 3명이 반대쪽에서 오고 있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새로 난 신작로를 따라 1.5km 정도 금산읍 외곽에 있다. 길은 한쪽은 논이고 한쪽은 냇가로 방천 둑으로 되어 있다. 아가씨 세 명은 무엇이 그리 조은지 껄껄거리며 내 앞을 지나친다. 여자를 모르는 나는 덩치는 컸지만 수줍음이 많아 아가씨들 앞을 혼자 지나가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아가씨 중 한 사람은 우리 앞집 사는 아가씨였다. 아마 친구들이 놀러 왔다 가는데 바르다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들이 웃으며 지나치는데 내 얼굴이 홍당무가 된 모양이다. 그들은 나를 지나친 다음에도 큰 소리로 웃어 댔다.
그날 오후 5시쯤 되었을까, 아랫집에서 아가씨들 웃음소리가 나며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내가 싸리문 밖으로 내다보니 아까 만난 아가씨가 비오 좋게 나를 놀리기 위하여 부르는 것이다. 나는 왜 그러냐 했더니 그냥 불러 본 것이란다.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처음 알게 된 아가씨가 신영자라는 아가씨다. 그 후 앞집 아가씨의 소개로 그녀를 알게 되었는데 이 아가씨는 성격이 너무 외향적이라 나이도 어리면서도 나의 내성적인 성격을 감싸주었다. 그러다 보니 쾌 긴 시간 그녀를 사귀었으나 나는 대학에 간다는 목표가 뚜렀하여 대학시험에 낙방한 후 그를 멀리하게 되었으며 마음속으로만 기억하는 이름이 되었다. 바로 이 아가씨가 나에게 첫 키스를 가르쳐준 아가씨다.
그 후 공부에 전념하다 대학에 진학한 후 바로 군에 입대하고 제대한 다음 복학하니 만학도가 되어 연애다운 연애를 못 해보고 보내다 중매로 결혼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결혼 후 사랑한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아 젊은 시절 집사람으로부터 핀잔도 많이 받았는데 어느 날부터는 내가 사랑한다고 아부를 하고 집사람은 콧방귀만 뀌는 사람이 되었다. 나이를 먹으면 다 남자가 사정해야 하나 모르지만, 여자들의 콧대가 세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지 모르겠다.
오늘도 한바탕 전투는 했지만, 부부간이 아웅다웅 다투는 것도 늙은이 할 일 없어 하나의 재미로 생각하면 그도 재미있다. 그마저도 없다면 종일 입 다물고 한쪽에 처박혀 살아야 할 테니까. 아이들이 무어라 해도 외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부부가 서로 자기 고집을 피워 본다. 그렇다고 미워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라도 떨어지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만나서 30분만 지나면 한바탕 해야 속이 시원하니 별난 부부다.
이처럼 싸워서 나는 집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다 5년쯤 되었나 어느 날 장모님이 아프다고 하여 식구가 처가를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혼자 집에 있는데 TV에서 아미 새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아름답고 미운 새 아미 새 당신 남자의 애간장만 태우는 여자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미워라. 다가서면 멀어지는 아미 새 당신
미워할 수 없는 새 아미 새 당신 남자의 약한 마음 흔드는 여자"
가만히 듣다 보니 그 노래 가사가 꼭 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내 집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을 말싸움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젊어서 늘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수줍어 표현하지 못하는 남편을 보고 왜 당신은 나보고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하냐고 졸라 댔는데 이제는 나만 매일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나 그녀는 콧방귀만 날이니 그놈의 속을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