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선몽(先夢)

일릉 2018. 3. 15. 19:42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찜찜하다. 꿈인 것이 다행이다. 1967년도의 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원서조차 내보지 못하고 돈을 벌기 위하여 공무원 시험을 먼저 준비한 것이다. 공무원 시험은 대전 고등학교에서 보는데 8시 30분까지 교실에 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다 보니 최소한도 아침 8시까지는 학교에 도착해야 교실도 찾고 미리 가서 차분하게 마음을 가란 처 시험 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금산에 사는 나는 아침 새벽에 일어나 금산에서 대전을 가는 첫 버스를 타야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 집은 금산읍이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2.2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리고 금산에서 대전에 가는 버스는 첫차가 05:30분이며 두 번째 차는 한 시간 후인 06:15분으로 기억된다. 금산에서 대전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거리는 1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오늘날 같으면 4차선에 포장도로로 30~40분이면 충분 한데 그때는 비포장도로로 넉넉잡고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됐다. 그리고 대전 종합 버스터미널(대흥동에 있었음)에서 대전고등학교까지는 여유롭게 30분을 잡아줘야 한다.


그러다 보니 아침 04시는 일어나 밥을 먹어야 시간적 여유를 부릴 수 있다. 꿈결에 내가 대전으로 시험을 보려고 가는데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트럭을 타고 가고 있었다. 차가 출발하여 떠나는데 나이가 나와 같은 1년 선배인 아가씨가 먼지를 보였게 일으키며 달이는 차를 쫓아오면서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아 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일어나 그의 손을 잡아 차에 태웠다. 그때는 트럭 짐칸에 사람이 앉을 수 있게 양옆으로 접이식 의자가 붙어있었다. 그녀는 내 옆에 앉더니 볼펜이 잘 나오나며 보여 달란다. 나는 웃으며 잘 나온다고 하며 잠에서 깨었다.


시험을 보려 가는데 여자 꿈을 꾸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시대가 지금과 같이 발전된 사회가 아니라 꿈과 미신을 상당히 믿는 사회라 시험을 보려 가면 어린아이 배냇저고리를 몸에 지니고 가는 시절이었다. 이럴 때 꿈속에 여자가 나타났으니 기분이 찝찝했다.


부지런히 밥을 먹고 버스 주차장에 가니 추운데 너무나 일찍 나왔다. 대기실이 3월 초라 썰렁했다. 대기실 시계를 보니 5시가 안 되었다. 첫차 출발 시간이 30분이나 남았다. 추위에 떨다 보니 갑자기 주차장에서 600m 정도 떨어진 외갓집에 가서 몸 좀 녹이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갔다. 외갓집 식구들이 반가이 맡아줘 방에 들어가서 몸을 녹이고 시간을 맞춰 나오려는데 외숙모가 잠깐 기다리란다. 그리고 교사 생활을 하는 외숙부의 잠바를 줄 테니까 추운데 입고 가란다. 나는 문 앞에 섰다 잠바를 받아 입고 주차장에 와 보니 버스가 눈앞에서 떠나고 있었다.


결국, 두 번째 차를 타고 가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대전 대흥동 종합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불이나케 대전고등학교로 뛰어가는데 교문에 들어서니 8시 30분이 넘었다. 모든 수험생들은 입실이 끝난 상태였다. 게시판을 보고 내 수험 고사실을 확인한 다음 찾아가니 막 시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시험 감독하시는 분이 좋은 분을 만난는지 받아준다. 원래 지각하면 받아주지 않게 되어 있는데 수험생이 애처로워 보인 모양이다. 숨을 진정시키고 수험표를 내놓고 시험지를 받아 답안지에 수험 번호와 이름을 쓰려니 볼펜이 써지지 않는다. 난감했다. 지각해서 정신이 없는데 분명 버스 안에서  볼펜을 확인했는데 잘 써지던 볼펜이 왜 안 써지는지 모르겠다. 여분으로 가져온 볼펜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1960대만 해도 볼펜이 나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고 학교에서는 잉크와 펜을 사용하여 개구장이 중학교 남학생들의 여름 교복은 잉크 자국이 여기 저기 묻어 있었다. 그러다 모나미라는 볼펜이 등장하는데 기술이 약해서 그런지 볼펜을 잘못 늦고 다니면 볼펜 심에 들은 잉크가 다 쏘다 저 옷을 버리기도 했으며 볼펜이 차가운데 있어도 잉크가 어는지 써지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짜 욱 거리다가 옆 사람을 바라보니 책상 위에 여분의 볼펜이 눈에 들어왔다. 염치 불고하고 작은 목소리로 "볼펜 좀 하나 빌릴 수 없을까요" 하니 나를 슬쩍 바라보면서

"시험 보려고 오는 사람이 펜도 안 가지고 오나?" 핀잔을 주면서 빌려준다. 내 얼굴은 순간 홍당무가 되었다. 이렇게 본 시험이니 합격할 이가 없다.


시험이 끝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신기도 하다. 새벽에 일어나면서 꾸었던 꿈이 어쩌면 그리 정확히 맞을 수가 있을까? 차를 놓쳐 타고자 쫓아 왔던 아가씨의 손을 잡아 줘 차를 타게 만들었는데 내 옆에 앉더니 볼펜이 잘 나오냐고 물어 왔던 것들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그 후 나는 꿈을 믿기 시작했다. 특히 중요한 시험을 보는 날 대부분 새벽에 꿈을 꾸면서 일어나는데 그 꿈들이 거의 다 맞았다. 그러다 보니 시험을 보기 전에 이번 시험은 합격이다 불 합겨 이라는 것을 예측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되었는데 어떤 때는 아이들 몫까지 선몽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그 꿈들이 나이 50이 넘어가고 사회적 지위도 조금 높아지니 어느 날부터인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


많은 사람은 꿈은 반대라고 하는데 나는 거의 같았다. 그렇다고 꾸는 꿈마다 맞는 것은 아니다. 분명 대부분은 개꿈이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꾸는 꿈이 맞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기한 꿈에 대하여 많은 정신분석 학자들이 연구했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정확한 해답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꿈이 잘 맞는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미신이라 할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에 신교육이 들어 오면서 조상들이 믿어왔던 토테미즘이나 샤머니즘은 미신이라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배운 것으로 기억된다. 김 씨의 조상이 된 김알지가 닭에서 나왔고 박 씨의 조상이 된 박혁거세는 말에서 나왔으며 환웅이 선을 본 아가씨는 호랑이를 믿는 집안 처녀와 곰을 믿는 집안 처녀였는데 곰을 믿는 집안 아가씨를 선택하여 낳은 아이가 단군이지 않은가?


다시 말해 종교라는 것은 하나의 믿음이요 얼마만큼 믿음이 깊냐에 따라서 기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내가 꾸는 꿈이 선몽을 하는 것은 어느 문제에 대하여 그만큼 심각하게 생각하고 생각하는 마음의 고민에서 예몽을 주는 것이 선몽이 않인가 생각해 본다. 그랬던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선몽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어느 날 살다 보니 내가 죽을 때까지 먹고 자고 입을 것이 걱정 없고 아이들도 다 성장하여 독립해 나갔으며 걱정이란 것은 건강만 챙기면 되는데 특이하게 나타나는 질병도 없으니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되다 보니 꿈이 필요하지가 않으니 선몽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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