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수의 '보릿고개'라는 노래를 듣다 보니 문득 도토리 밥을 먹으며 한 해 겨울을 나던 시절이 떠 오른다.
아마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흉년으로 학교에 수업료를 내지 못해 제적을 당하고 집에서 일하던 해로 기억된다. 1962년 겨울이 않은가 싶다.화폐개혁이 단행되던 1962년 고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 된다.
그 해 봄 가뭄이 극심하여 학교에서도 수업을 제대로 못하고 7월까지 모내기를 하지 못한 논에 밭곡식이라도 심을 수 있도록 농촌 일 손 돕기를 다니던 기억이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당시 우리 집 논농사라는 것은 전체가 천수답 600평을 경작하였다. 가뭄이 극심하여 벼가 타 죽는 것을 막아보려고 남의 집 인삼밭 둑으로 물길을 200m 정도 내었다. 그리고 또랑에 물이 새지 않도록 질흙을 발라 물길을 만들었다. 그다음 하천에 물 구덩이를 파서 나무에 매단 바가지를 이용하여 밤새 물을 퍼 올렸던 기억이 새롭다. 밤새 물을 퍼 올리고 새벽에 논에 가보면 물은 어데로 갓은지 논에는 물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남의 인삼밭 둑에다 새로 만든 물길에는 지렁이란 놈들이 구멍을 뚫어 다 새 버리고 논에까지 도달하는 물은 전지를 들고 물길을 점검할 때만 잠깐 도달하는 것이다.
16살 먹은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 보다는 학교가 끝나기 바쁘게 쇠꼴을 한 바닥 베어다 놓고 저녁을 먹으면 밤 11시까지 논에 물을 대고 집으로 돌아와 12시가 넘어야 잠깐 눈을 부치는 생활이었다. 그러니 공부를 제대로 해 본 일도 없고 학교는 매일 지각에다 수업시간에는 수업을 듣기보다 조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렇게 열심히 농사를 지었건만 가뭄에 겹처 벼에 도열병이 전국을 강타하였다. 우리 집 논 600평에서 거두어들인 곡식 전체가 고작 싸라기 쌀 반가마 남짓 하였다. 긴긴 겨울 먹을 식량이 없어진 것이다. 지금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런 흉년으로 정부에서 대책을 세운 것이 도열병에 강하고 수확이 많은 신품종을 개발한 것이 통일벼로 알고 있다. 신품종인 통일벼는 밥맛은 조금 떨어지지만 수확이 재래종보다 2배 이상 많이 생산되어 모든 농민들이 재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다 뒤에 밥맛도 좋은 추청벼라는 신품종이 개발되어 통일벼는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결국 나는 10월에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 일을 돕는 일꾼이 되었으며 우리 집은 그 해 겨울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 어른들이 대동아 전쟁이나 한국동란 때 초근목피로 연명했다고 하는데 나에겐 그런 기억은 없고 1962년 겨울이 가장 잔인한 흉년의 해로 기억된다.
원래 젊은 부모님들은 열심히 일을 하였지만 자연에서 오는 재해를 막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신통한 것은 흉년이 드는 해는 산에 도토리가 많이 달린다는 어른들의 말이 있다. 흉년이 든 1962년에는 도토리가 풍년이었던 모양이다. 30대 중반이던 어머니는 억척같이 금산에 있는 진락산의 이 골짝 저 골짝을 헤매며 도토리를 따 날랐다.
도토리 하면 묵이 않은가? 쌉싸름하면서도 독특한 맛에 등산하고 내려와 도토리 묵 한 접시와 부치기 한 접시에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한 잔, 그 맛을 어디다 비길 수 있으랴. 그 재미로 등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 ~~~. 나에겐 그 도토리가 지겹도록 싫은 것이다.
우리 집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도토리 밥을 해 먹었다. 도토리 밥은 내 어머니님이 새로 개발한 음식인 것이다. 도토리를 태양에 말린 다음 절구에 찌어 껍질을 벗긴 후 물에다 1주일이고 2주일쯤 담가 뜬 맛을 우려내고 다시 절국에 찌었다. 절구에 찌은 도토리를 싸라기 쌀과 석어서 팥을 얹어 밥을 하면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허기에 지친 우리 가족들은 도토리 밥이라도 먹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 마저도 준비를 하지 못한 가정은 굶다시피 하면서 고구마 등으로 새봄이 돌아와 보리 쌀이 나올 때까지 굶주림을 참고 이겨내야 했다. 오늘날 돼지도 잘 먹지 않는 정미소에서 나오는 겨 가루다 쑥을 버무리는 쑥버무리를 해 먹기도 하고 논이나 보리밭의 둑새풀 씨았을 훌터다 볶아서 먹으며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 잔인한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다. 나도 말로만 듣던 보릿고개를 혹되게 경험한 것이다.
오늘날 도토리 밥을 먹으면 건강보조 식품으로 성인병에 최고의 음식이었겠지만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시절 도토리 밥은 한참 자라나는 나에게는 잔인한 음식이었다. 그 결과 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치질이 심하여 탈홍 증세까지 나타나 군대에서 한 번 수술을 받고 다시 재발해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구에까지 가서 수술을 받아 병을 치료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가난으로 인하여 가을이면 배가 고파 밥 대신 생무로 허기를 때운다던지 볏단을 지어 나르면서 익지도 안은 떤 땡감을 어그작 어그작 깨물어 먹던 어린 시절이 너무나 새로운 기억으로 되살아 난다. 결국 이런 가난은 나에게 위장병을 가져다주어 50이 다 되도록 위궤양과 위염으로 약봉 다리를 옆에 끼고 살아야 하는 고통을 받기도 하었다.
그런 경험을 가진 나는 억척이랄까.
오늘날 나는 이런 가난에서 벗어나 사회의 중류계층 생활을 하고 있으며 남에게 자랑할만큼은 되지 못하지만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을 정도는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인가? 그리고 과일이고 과자고 먹기싫어 먹지않는 삶을 살고 있으니 신이 나에게 노력한 댓가를 인정해 준 모양이다.
오늘 날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자녀들이나 손자 녀석들은 얼마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가?
종종 해외에 나가 선진국이라는 나라 사람들의 생활을 봐도 우리들의 생활이 그들의 생활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으니 얼마나 발전한 나라인가? 이제는 하나의 추억으로 변한 '보릿고개' 노래 가사가 내 마음을 적시며 도토리 밥을 해 주시던 어머님 생각이 가슴 속 깊이깊이 되 새겨진다. '추억의 도토리 밥' 지금 먹으면 어떤 맛이런가. 한 번쯤 먹어보고 싶은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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