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내 추억의 1970년대 한국 정치사

일릉 2017. 3. 30. 04:15

 오늘날까지 수시로 변하는 대학 입시제도가 1969 학년도에는 예비고사라는 것을 도입하었다. 그동안은 대학입시제도가 대학별로 2과목에서 5과목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고 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대학입시제도는 본고사 이전에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실시하는 예비고사를 도입하였다. 예비고사는 고등학교 교육과정 전과목을 시험과목으로 정하고 합격 인원 수는 대학 정원의 1.5 배 수로 정하였다. 그러다 보니 대학을 진학하려면 예비고사에 합격해야 원서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예비고사 합격자는 본고사에서 경쟁률이 높지않아 소수의 몇 개 대학과 몇 개 인기학과를 제외하고는 인원미달 사태가 속출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정상화와 각 대학의 부정입학을 막게된 동기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3년이 지난 나는 벼락치기로 공부를 하여 예비고사를 무사이 통과하여 지방 국립대학에 들어갔다. 내가 들어간 대학의 입학 정원은 약 180명 정도였으며 단과대는 2과에 정원이 40명이었다. 그리고 40명 중 19명이 재수에서 사수한 학생들로 2학년이나 3학년 보다 오이려 평균 연령이 높았다. 그 이유는 좋은 대학을 진학하려고 재수 삼수하다 전과목

                 지리산 화엄사  화엄사의 3층 4사자 석탑(국보 제 35호)

의 예비고사가 나타나니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대학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학에 입학을 해놓고 군에 가는 사람과 1학기를 마치기가 바쁘게 군에 입대하는 학생들이 많이 나타났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1969년 7월 11일 입영 날자를 받아 놓고 있었다. 


제 3공화국을 수립한 박정희 대통령은 4년 4년 두번의 임기를 맡치고 대구에 있는 한 사립대학 총장으로 간다는 뉴스가 흘러 나왔다. 그 대학이 대구에 있는 두 개의 사립대학(대구대와 청구대로 기억 됨)를 합처 만든 영남대학교로 서울대학교 신입생보다 정원이 많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대학이었다. 어린 내 생각은 참으로 양심적인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3선개헌이라는 헌법을 개정하여 장기집권 하려고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여 재선만 한다고 하니 너무 멎저 보였다.


그런데 권력에 욕심이 생겼나 지금까지 추진하던 각종 정책을 완수하기 위하여 한 번 더 대통령을 한단다. 국회는 여당이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니 어렵지 않고 국민투표는 무지의 국민들에게 조금만 선심을 베풀면 되고 찬성표를 만드는 비법도 가지고 있으니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는 일이 않인가?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소수의 야당 및 지식인과 대학이 문제 였다.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야당의 목소리가 나오는가 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부터 3선개헌 반대 집회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우리 대학에서도 1학기 기말고사가 7월 초에 잡혀 있는데 시험 첮 날 학교에 나가니 학생회에서 4층에 있는 소강당으로 모이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른체 왼일이냐고 강당에 들어서니 출입문에 책상과 의자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학생회 대표들이 일장 연설이 시작 되었다. 그러자 문밖에서는 교수님들의 발자국 소리와 문을 두드리며 열라고 고래고래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법정대 학생들은 전체 인원이 150명 남짖하었다. 


우리는 10명씩 스크램을 짜고 교문 밖으로 나가려 하니 언제 연락이 되었는지 교문 앞에는 경찰병력이 바리키이트를 치고 학생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었다. 교문 밖으로 진출하려다 방향을 돌려 학생수가 많은 문리대학과 농과대학, 상과대학을 돌며 "3선 개헌 절대 반대"를 외치다 해산 하였다.  그로인해 학교는 시험을 중단하고 임시 휴교령이 내려 문을 닫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3선개헌 투표를 군대에서 하게 되었는데 내가 있는 부대에서는 나에게 투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유는 중대장이 중대원을 모아 놓고 나에게 법대생이니 헌법 개정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미국 헌법의 예를 들며 미국 초대 대통령인 죠지 워싱톤이나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은 국민들이 종신 대통령을 하라고 해도 장기집권하면 독재가 된다고 재선만 하고 물러나는 전례를 세워 헌법에 규정이 없어도 재선만 하는 것이 선례가 된나라다. 그러다 2차대전 때 전쟁중이라 루즈벨트가 4선까지 당선되는 사례가 있었다. 그 후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만 할 수 있도록 개정했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그러니 반대할 것이 확실하니 내 투표용지는 어데로 갓는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3선 개헌 후 군에서 대통령 선거를 맞이 했다. 여당은 박정희 후보, 야당은 40대의 기수로 김대중 후보가 나왔으나 기억하기로는 60여만표차로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된 것으로 기억 된다. 그리고 영호남의 지방 갈등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1872년 6월 군에서 제대하고 마을에 돌아오니 그동안 새로 나타난 '새마을 운동'과 '새마을 금고'라는 것이 활성화 되고 있었다. 마을 곳곳에는 농로를 만들었고 초가집은 스레트 지봉으로 변하였다. 이런 상황에 마을 이장은 고등학교 시절 4-H를 추진한 나에게 새마을 지도자와 마을금고를 맡아 달라고 했다. 나는 한동안 갈등을 느꼇으나 대학을 마저 졸업한 후 생각해 보자고 1학년 2학기에 복학한 것이다.


1972년 10월 17일 아침 하숙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아줌마가 '모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 학교를 등교할 수 없다는 계험령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뭐 그럴리가 있나요'하면서 친구와 같이 군인들이 지키는 교문을 피해 개구멍으로 학교에 가보니 학장님이 반겨 맞으며 군인들이 완전무장하고 학교를 점거하고 있으니 연락이 갈 때까지 각자 알아서 공부를 하란다. 이 때 선포된 것이 그 무시무시한 '유신 헌법'이라는 것이다.


이런 계험령 속에 대학은 '유신 반대 데모가 계속 일어 났다. 2학기 중간고사만 시작되면 학교는 여지없이 휴교령이 떨어지고 우리는 절이나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대학 3학 때의 일이다. 나는 정치외교학과 과대표를 맞고 있는데 같은 학년의 복학생들이 우리 학교도 유신 반대집회를 하잔다. 복학생 19명이 시내의 유일한 관광호텔로 집결라였다. 19명 중에는 학생회장과 과대표등이 모두 있었다. 우리는 한사람도 외출을 허용하지 않고 아침이 되자 똑같이 학교로 등교하여 유신 반대데모를 시작한 것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들은 데모를 주동하는데 보안이 잘 되는데 지방대에서는 데모하기가 어려웠다.  그 이유는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경찰에 근무하는 분들이 있어 사전에 정보가 새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교하면서 곧바로 호텔로 들어 와 아무도 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전화가 발달되지 않은 사회라 정보가 새 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법대에서 시작된 데모는 공대로 농대로 상대로 이어져 총학생회도 나설 수 뿐이 없었다. 이와 같이 대학 4년 동안 2학기는 한 번도 제대로 다녀보지 못하고 졸업을 하였다. 그 후 4학년 때는 대학에 총학생회를 해산하고 학도호국단이 대행하면서 대학에서 일단 데모가 사라지게 되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준비하던 시험에서 불합격하자 진로를 바꾸어 1977년에 교직에 진출하게 되었다.  내가 속초의 모 여자중학교에 근무하던 1979. 10.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경호실장 차지철과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것이다.


월요일로 기억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10월 26일 아침 일찍 출근을 하였다. 학생과를 담당하고 있던 나는 교문을 들어서면서 국기 게양대에 조기가 걸여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교무실을 들어서는데 장송곡이 흘러나왔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먼저 출근한 윤리과장을 보고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조기가 걸여 있고---?" 하니 윤리과장이

"김과장 몰라? 대통령이 서거한 걸?"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는 순간 슬품보다 이제는 숨쉬는 나라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요"라고 건승으로 대담하며 생각하니 표정을 관리해야 겠다는 생각이 번듯 들어 왓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 직원조회 시간에 교장은 눈물을 흘리며 곧 전쟁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허긴 속초란 곧은 38 이북이요 교장 교감 선생님 모두 북쪽에서 피난 나와 사시는 나이드신 분들이니 젊은 나와는 생각의 차이가 많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로인해 유신체제는 무너지고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정치의 봄이 오는가 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허상이었고 12.12사태로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가 계험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강제연행하면서 권력을 잡게 된 것이다. 12.12 사태는 유언비어인지는 모르지만 12. 12일 새벽에 서울의 어느 곳인지 모르지만 하수구에 별들이 반짝이는 시체가 가득했다는 소문이 강원도 속초까지 흘러 들어 오기도 했다.


'횡설수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대바리  (0) 2017.06.12
늙은이의 변  (0) 2017.06.12
내 추억의 1950~60년대 한국 정치사.   (0) 2017.03.15
추억의 도토리 밥  (0) 2017.03.06
표창장과 상장  (0) 2017.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