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 70年 史 결코 짧은 세월만은 않인 것 같다.
인류의 역사나 한 나라의 역사에 비교한다면 하나의 점일런지는 몰라도 격동기 급변하는 시대의 70년은 너무 많은 것들을 변화 시켰다.
해방 직후(1947년) 태어난 나의 인생은 우리 대한민국 정부와 같이 근대사를 장식한 것이다.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지난 날을 회상해 보니 꼭 설악산의 공룡능선과 같이 험난하고 양양 하조대 정자 옆 바닷가 낭간에 선 낙낙장송 같이 모진 풍파를 다 만나며 살아 온 기분이 든다.
내가 태어난 다음해 정부가 수립 되었고 한참 재롱을 떨 때 한국동란으로 3년간의 전쟁을 치루었다. 아주 어린 유아의 나이기에 6. 25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고 야간에 빨치산 습격을 피해 피난을 간다고 어느 분인가 기억은 없지만 지개를 타고 가던 기억과 우리 집뒤의 자그마한 뒷동산에서 밤중에 총소리가 나 어머님이 귀를 막아주며 이불을 뒤집어 쎄워주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살던 곳은 운장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아마 지리산의 빨치산들이 운장산을 거처 대둔산으로 가다 저지른
소행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초등학교
설악산 권금성에서 본 공룡능선과 현북 하조대 정자 옆 소나무
때 금산읍 음지리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그 곳은 금산읍에서 남이면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남이면이란 곳은 대둔산에서 가깝고 주변에 600고지라는 산이 있는데 이곳은 휴전 후에도 오랜기간 빨치산 소굴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학교에서 오다보
면 비포장 신작료에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을 태운 군용트럭이 몇 대씩 지나가곤 했다. 군용트럭이 지나가면 우리는 군인들에게 건빵과 초꼬렛을 달라고 소리치며 먼지를 뒤집어 쓰는 줄도 모르고 뜀박질 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 후 중학교 1학년 말(당시는 4월 1일부터 새학기가 시작 됨)인 1960년 3월 15일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분명 학교에서 민주주의의 선거제도는 보통, 평등, 비밀, 직접 선거를 하여야 한다고 배웠는데 어른들 말씀은 세 사람이나 여섯 사람이 조를지어 기표소에 들어가 기표를 하고 서로 보여준 다음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어야 한다고 한다. 삼삼 조나 육육 조를 지어 투표를 해야하 한다고 했다. 공무원들이 반상회에 와서 교육을 했고 이장과 반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조를 편성했 주었다고 하면서 무슨 이런 선거가 있야고 하시던 어른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투표할 때 기표할 사람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봉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상대는 신익희 선생으로 기억 되고 3대 때는 조병옥 박사로 기억되는데 기억이 조금씩 뒤 엉킨다.
비밀투표에 위배되는 구구조나 육육조는 자유당의 이기봉을 부통령으로 당선 시키기 위한 자유당 정권의 불법 선거를 말한다.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섯 던 신익희 선생이나 조병옥 박사가 투표 전에 서거하여 대통령은 이변이 없는 한 자동으로 이승만이 당선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통령 선거는 여당 후보인 자유당의 이기봉보다 야당 후보인 민주당의 장면 박사가 인기가 높아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즉 대통령은 이승만, 부통령은 이기봉에게 기표를 했나 않이했나 여섯 사람이나 아홉 사람이 서로 감시하는 투표 방식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육육구구 투표방식인 3.15 부정 선거로 4.19 학생 의거의 도화선을 만들어 준 것이다.
1960년 4월 중학교 2학년이 된 나는 늦은 봄 어느 날 학교에 등교했는데 중.고 병설인 우리 학교는 고등학교 3학년 형들이 부서진 책상 다리를 들고 교실로 들어 와 책상을 치면서 운동장으로 집합하란다. 전교생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고등학교 형들은 조회대에 올라가 소리 소리 지르며 "체육 선생 민ㅇㅇ 는 물러가라" " 영어 선생 박ㅇㅇ 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처대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는 고등학교 형들이 무서워 구호에 따라 "물러가라, 물러가라"하고 목이 떠져라 외치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우리 학교에서 있었던 4. 19 여파라는 것을 뒷 날에 알게 되었다. 다시말해 4. 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제 2공화국인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세상의 주인은 학생들로 변하여 교실에서 공부를 해야할 학생들이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여파가 우리 학교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체육 선생 민ㅇㅇ 선생님은 중학교 미술 교사로 내 기억에는 참 좋은 분 이었는데 고등학교 학생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분은 중학교 미술과 고등학교 체육을 겸해서 지도하였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체육 선생님이 공을 잘 내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영어 박ㅇㅇ 선생님은 학생들을 잘 지도하겠다고 학생들에게 질문하여 틀리면 '라이트 펀치' '레프트 펀치'하면서 군밤을 준다던지 또는 자기 마음에 들지않는 태도를 보이는 학생이 있으면 실내화(헌 구두의 뒤창을 뜻어내서 만든 실내화)를 벗어 볼기짝을 발갓게 때려주던 선생님이라 대다수 학생들이 무서워 하고 싫어 했다. 결국 두 분은 학교를 그만 두었다. 사실은 그만 둔 것이 않이라 다른 학교로 전출을 간 것을 한참 뒤에나 이해한 것이다. 이것이 나의 4.19 학생의거 기억이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헌법이 개정되어 정부는 내각 책임제, 국회는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가 나타낳고 주민자치를 활성화 한다고 시골의 면장까지 선출하는 선거 열풍이 몰아 닥첮다. 중앙 정부의 선거 결과 대통령에 윤보선, 국무총리에 허정이 들어 섯는데 이것이 바로 제 2공화국 민주당 정권인 셈이다.
이런 혼란 속에 다시 혁명이 일어났다. 1961년 중하교 3학년 시절 5.16 군사혁명(당시는 그렇게 부름)이 일어난 것이다. 학교에서는 모든 학생들에게 6개조(정확하지 않음)로 된 혁명공약을 외우지 못하면 방과 후에 남아서 외우는 일이 벌어졎다. "우리는 반공을 제 1의 국시로 삼고 ~~~~"로 나가는 것으로 기억 된다. 그리고 국경일이 되면 읍내의 중고등학생들이 한 곳에 모여 일장 연설을 들어야 했고 연설이 끝나면 구호를 외치며 시가 행진을 하는 것이 일년이면 몇 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행사 때마다 빈혈에 쓰러지는 학생들이 몇 명씩 속출하는 것이다. 가난뱅이 농부의 아들인 나는 이런 행사 때가 되면 죽을 맞이었다.
나에게는 중학교 앨범이 없다. 이유는 정부에서 학교의 부정을 막기 위하여 앨범을 만들지 말라고 했단다. 그 결과 중학교 졸업사진은 전교생이 한 장으로 찍은 사진뿐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도 특수 학교(예, 철도고 등)만 제외하고 다른 시도로 진학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정형편이 여유롭고 공부를 잘하던 금산군 학생들은 인근에 있는 대전시 진학을 할 수 없고 멀리 떨어진 전주시로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된 것이다.
1962년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초여름 어느 날(5~6월경) 친구들과 제원면에 있는 철래강(금강 상류)이란 곳에 놀다 온적이 있다. 그런데 그날 화폐개혁이 단행되어 잃혀지지가 않는다. 우리나라 화폐단위가 환이었는데 원으로 바뀌면서 환율의 변동이 나타난 것이다. 즉 천환짜리가 백원으로 변하였다. 그러다 보니 셈이 밝지 못한 사람들은 백환을 지불한다고 백원짜리를 주었다는 이야기 하나의 코메디가 되었고, 어느 집에서는 돈이 자루로 나왔다는 둥 갖가지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리고 돈을 바꾸어 주는데 일정한 액수를 정하여 남어지 돈은 후에 주는 방식을 택한 것으로 기억 된다. 즉 집 장농 속에 꼭꼭 숨어 있던 돈이 다 들어나게 되고, 누구 내가 돈이 제일 많은가 소문도 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금지나서 고리채 정리라는 정책이 나타났다. 고리채 정리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남의 돈을 빌려다 쓴 사람은 관공세에 신고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채무자는 정부에서 정해준 저금리로 일정기간 동안에 변제해 나가도록 한 정책이다. 이 정책은 빗더미에 허덕이는 서민들을 위한 정책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는 빈민 구제 정책이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사회적 갈등을 빗기도 한 정책 이었으나 서슬이 시퍼란 군부 세력의 정권에 누구도 도전하지 못하였다.
5. 16 군부 쿠테타(군사혁명이라 부름) 당시 군부는 사회가 안정되면 정권을 일반인에게 이양한다고 약속했는데 이는 하나의 공염불이 되었다. 국가재건최고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육군소장 박정희는 본인의 억개에 스스로 별을 붙히고 또 붙히어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다음 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된 것이다.
그 때 선거운동을 하면서 어른들이 보여주던 모습들이 머리를 스처간다. 하나의 스토리 같은 막걸리로 표를 산다는 '막걸리 선거' 고무신으로 표를 산다는 '고무신 선거' 돈을 주고 기표한 투표 용지를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고 기표하지 않은 용지를 받는 '릴레이식투표' 밀가루를 받아 먹고 투표했다는 '밀가루 투표' 등 오늘 날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다. 특히 5일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장날이면 시골 사람들은 막걸리 한 잔에 자기표를 판지는 모르고 술이 거나하여 비틀거리며 술주정 하던 모습들이 아른 거린다. 이런 투표를 하는데도 어른들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시 못하는 게 바보라는 인식을 가진 후진 사회 풍경이었다.
허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GNP가 약 70~80불 정도요, 1년 정부 예산이 1조 몇 천억원 정도라고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보면 얼마나 가난하게 살던 시절인가? GNP를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1,000 불 이상이면 선진국이요, 500~1,000 불 사이를 중진국이라고 분류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국가 총예산이라는 것이 오늘 날 조그마한 시군의 예산과도 비교가 되지않는 시대이다 보니 먹을 것, 신을 것, 입을 것을 주면 찍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대통령 입후보자는 여당으로 육군대장 출신 박정희 후보와 야당은 윤보선 후보 등 여러명의 후보들이 나왔으나 두 분이 다투는 선거였다. 그 때 담벼락에 붙은 흙백의 벽보들도 '못 살겠다 갈아 보자' '갈아 봣 좌 별 수 없다' 등등 코메디 같은 이야기들이 주마등 같이 지나간다.
그리고 국회의원들 선거에서는 야당 입후보자가 선거 유세를 하면 불량배들이 횡포를 부린다고 하였으며 트럭같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확성기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이런 선거 결과 야도여촌 현상으로 도시에서는 야당이 시골에서는 여당이 당선되는 현상이 두드러졎다. 그 이유는, 도시 사람들은 배움이 있어 여당을 견재하기 위하여 야당을 찍는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공화당은 대도시에서 여당의 국회의원 당선 숫자를 높이기 위하여 중선거구제를 도입하였다. 한 선거구에 두사람을 뽑는 중서구 제도는 야당만 당선되던 서울에 큰 변화를 준 것이다. 한 선거구에 여당에서는 한사람, 야당에서는 두사람이 출마하다 보니 여야가 각각 한사람씩 당선되어 야당이 싹쓸히 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인구가 적은 지방에서는 여전히 소선거구제로 여당이 거의 독식하다 보니 국회를 거의 여당 국회의원들로 채운 것이다.
내가 살던 금산이란 곳도 초대 국회의원은 우리 나라 최초 여성 장관이면서 대통령 입후보도 했던 자유당의 임명신 여사가 당선되었다가 2대 때는 야당 당수를 지낸 유진산 총재가 당선되었다. 그러다 5. 16 이후 군부 세력의 한 축이었던 길재호라는 사람이 나타나 그를 당선 시키기 위하여 금산군을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시켯다고 어른들은 말하고 있었다. 결국 야당인 유진산은 지역구를 여당인 길재호에게 내주고 서울 노량진으로 지역구를 옳겨 당선된 것이다. 이런 일로 그 당시 금산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금산의 4대 명물로 '임명신' '유진산' '길재호'에다 지방의 토산물인 '인삼을 들곤 했다.
이런 사회적 풍경은 가난 속에 사는 시골의 순박한 나를 진념이 강한 인격의 소유자로 변화 시켰다. 아무 짬도 모르고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내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실천해 보겠다고 나름대로 생의 설계를 세운 것이다. 집에서 일을 하면서 반 염세주의로 변했던 나는 글을 쓰는 글쟁이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받아보겠다고 글을 써보다가 고등학교 1학년 말경 병원에서 페결핵(사실은 감기가 오래되어 폐렴 정도를 X-R도 없는 병원에서 한 이야기 임)이라며 산 속으로 들어가 살으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
이런 시련을 격던 나는 가난하고 모순된 사회를 바꾸어 보겠다고 유능한 정치인이 되는 것을 꿈으로 삼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내 명찰을 정치에 제일 능한 사람이란 뜻으로 政一能이라고 바꾸어 달고 다니었다. 그리고 마을에 꿀벌 4-H를 조직하고 금산읍 연합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런가하면 겁없이 청와대에 편지를 보내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편지를 받아 회원들에게 낭독해 주며 잘사는 농촌을 만들어 보자고 선동하던 지난날이 그리워 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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