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않자 손을 비비다 보니 문득 내 왼손 엄지 손가락의 흉터가 보인다.
까마득하게 잃어버린 세월에 묻혀버렸는데 갑자기 아련하게 중학교 일 학년 시절 소를 먹이던 기억이 떠 오른다.
10살 배기 초등학교 4학년인 동생과 13살 먹은 중학교 일학년인 나는 소여물을 썰은 적이 있었다. 동생은 작두를 밟고 나는 작두에 않자 집을 넣는 일을 하다 작두에 박힌 집을 치우려고 손을 넣는 순간 동생은 작두를 밟은 것이다. 순간 나는 "악"하고 고함을 치자 동생은 겁에 질려 작두를 들었는데 내 왼손 엄지 손가락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밟다가 멈추었기 다행이지 엄지 손가락 전체가 날아갈 뻔했다. 그 흉터가 60여 년이 지난는데도 아직까지 남아서 눈에 띈 것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으로 나는 중학교 일학년 때부터 소를 먹여야 하는 소 깔(꼴의 사투리) 머슴을 살은 것이다. 햇 수를 헤아려보니 7년이란 세월이나 되었다. 중학교 3년에다 고등학교 2년, 거기에다 고등학교를 다니다 그만둔 2년이 포함되니 7년이란 세월이다.
처음 우리집에 소가 들어온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가난하여 소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남의 집 소를 키워주게 된 것이다. 장예 소라 하든가? 이름도 잃어버렸다. 즉 돈이 있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송아지를 한 마리 사주면 그 소를 키워 주고 송아지를 나면 갖는 것이다. 이런 송아지가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품팔이로 남의 집 일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 소를 키우는 것은 13 살배기 중학교 1학년인 내 차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때부터 나는 소깔을 베어 나르기 위하여 지게를 집어지는 지게꾼으로 일이 시작된 것이다. 대부분은 아버지가 소꼴을 베어 날랐겠지만 학교에만 갔다 오면 나도 소꼴을 베어 나르는 깔 머슴이 된 것이다.
겨울이면 소여물을 만들기 위하여 작두로 집을 쓸어야 하는데 힘이 없는 나는 작두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아버지로부터 꾸중 듣던 기억들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겨울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소여물을 끌이는 일은 잠만은 어린 시절 죽기보다 싫었으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 일이었다.
내가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소꼴을 베기 위하여 학교가 끝나기 바뿌게 집으로 돌아와 숫돌에 낮을 갈고 꼴찌 개를 질 머지고 이논 두덕이나 저 밭둑을 찾아 헤매었으며, 습기가 있어 풀이 잘 자라는 또랑가를 찾아 마을 골짝마다 다 뒤지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툭하면 손 고락을 베는 것은 여 반사요 어떤 때는 논둑의 풀을 베다 보면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을 만나면 놀라서 기겁을 하기도 하였다.
어쩌다 학교에서 영화라도 한 편 보여주는 날이면 늦게 집에 오게되어 어두워질 때까지 풀을 베어야 했다. 그러다 풀을 베지 못하는 날은 소는 굶어야 했고 나는 부모님들로부터 직 싸게 혼나야 했다. 그 보다도 가장 괴로운 것은 비가 오는 장마철이다. 소나기가 쏟아지는데도 비옷도 없이 꼴을 베러 가기 위하여 비를 맛고 나서는 신세가 처량하였다. 똥 다발만큼이나 베어 오는 소꼴이다 보니 우리 집 소는 늘 굶주리는 날이 많았을 것이다.
이야기 책에서 나오는 '비가 오는 날 꼴 짐을 지고 소를 몰고 가는데 바지 가랑이는 내려가는 꼴머슴의 황당한 모습'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으며 그런 일이 그리 귀한 일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발을 잘 못 디뎌 꼴짐이라도 넘어가는 날이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렇게 소꼴 머슴이 된 나는 짧은 시간에 많은 풀을 베려고 노력하다 보니 풀 한 포기라도 더 쥐려고 오른 손가락을 뻐치고 또 뻗친 결과 왼손과 오른손 뼘이 다른 짝 뼘이 되었다. 오른손은 낮을 잡는 손이라 뼘이 23cm인데 왼손 뼘은 25cm로 2cm나 더 늘어난 것이다. 허긴 되 바쁠 때는 손가락에 풀을 감고 또 감아 꼴 한 주먹이 한 다발이 될 수 있도록 쥐는 법도 배우게 되었으며, 엉터리 풀이지만 30~40분에 한 발채를 베기도 하였으니 꼴머슴 중에 상 꼴머슴이 된 것이다. 이런 나는 지금도 풀베는데는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생활을 면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대학을 가겠다고 생각하면서 면하게 되었다. 부모님에게 반항을 하면서 집에서 뛰처나와 자취하는 친구들 집을 전전 하면서 가정 일손 돕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일이 많은 부모님들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밑에는 동생들이 자그만치 7이나 되는데 큰 아들이란 녀석은 공부를 하겠다고 집안 일을 돕지않으니 아마 속깨나 아파 하셨을 것 같다. 그런 생활을 한 나는 마을 사람들이나 친척들로 부터 나쁜녀석이라고 낙인이 찍히기도 하였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나는 굴하지 않고 늦게나마 공부에 매진하여 그 지긋지긋한 시골의 지개 밑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친척들이나 마을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던 나는 그 마을에 유일한 대학생이 되었고 도시로 나와 도시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뒤에는 동생들도 본 받아 이웃 집 아이들보다 공부를 잘 하게 된 것이다. 일손을 돕지않는다고 그리 나무라시던 부모님들이 이제는 큰아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가난 속에 허덕이는 부모님을 돕지않고 대학에 간다고 공부한다며 미친 사람이라고 했다는 마을 사람들도 생각을 달이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한참 친구들과 재미있게 돌아다니며 놀아야 할 때 집안 일을 돕다보니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끼를 발산하지 못하고 살아온 불행한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다. 친구들과 어울여 노래 한 번 제대로 불너보지 못했으니 노래를 할 줄 아나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을 해본 적이 없으니 운동을 할 줄 아나 제대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벼락치기 공부 몇 줄 한 것으로 일생을 살아 가려니 불쌍할 수 밖에 ~~
직장에서 체육대회가 있으면 맨날 뒤전에서 박수나 쳐야 했고 어데 야유회라도 나가면 노래 한마디 할 줄 모르니 얼굴 붉히며 사양하다 마지 못해 한마디 부르면 음치라는 놀림이나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사회적으로 자그마한 지위가 오르다 보니 운동할 기회도 조금씩 나타나고 노래를 들어 볼 기회도 생기었다.
평생 음치인 줄 알았고 내 몸은 둔치라 운동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노래를 썩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럴듯 하게 시눙을 내고, 운동도 곧 잘 하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의 추억이 된 꼴머슴 ---
지금은 구경도 할 수 없지만 나만 간직하고 있는 하나의 추억으로 아련히 머리 속에 맴돌며 눈가에 웃음이 스처 간다.
그래도 몸은 고달펏으나 갈등이 없었던 그 시절이 행복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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