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농부집 아들

일릉 2018. 1. 10. 09:28

 

고구마 수확 모습

 

세상에 농부의 아들로 태여 난 것이 이처럼 자랑스러울 줄 예전에 미처 몰랐다. 어려서 지지리도 가난하고 부모님들 일손 돕는 것이 죽기보다 싫을 때도 있었는데 나이 먹고 보니 그보다 더 큰 유산은 없는 것 같다. 이제 내가 철이 들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시골 농촌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학교라고는 문턱도 가보지 않은 분들로 열심히 농사일하시면서 사신 분들이다. 19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후유증도 있었겠지만 발전하지 못한 우리나라 농촌의 생활은 너나 할 것 없이 비참하였다. 1950년대 우리나라 국민 1인당 GNP가 80불대 수준이었으니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하긴 2만 불 시대에 사는 요즘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던 것이 내 어린 시절이 아닌가?

 

 

난 날을 되돌아보면 초등학교 2~3학년 때부터 부모님 일손을 도와주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꼴머슴과 지게를 짊어진 것 같다. 동생들을 등에 업고 어머니를 찾아 논밭으로 찾아다니는 것은 늘 있는 일이요 초등학교 다닐 때 농번기 어느 날인가는 동생을 데리고 학교에 같이 가서 생활한 적도 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다니다 흉년으로 학교를 더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하는 농부로 전락한 일도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62년으로 기억된다. 학교에 가서도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대민지원 일손 돕기로 7월 초까지 모내기를 하지 못한 논에 나가 흙덩이를 부숴 주었는데도 가뭄과 벼 도열병으로 흉년이 들어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일하는 농부로 변신한 것이다.

 

이때 내가 해본 일은 농촌에서 하는 일은 거의 다 해 봤다. 모내기는 당연하고 별별일을 다 했다. 그중에서 가장 하기 싫었던 일은 보리타작 같다. 보리 알 끝에 붙은 부푸러기가 땀에 젖은 옷에 붙으면 왜 그리 껄끄러웠든지 이차지지가 않는다. 내가 배우지 못한 농사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밭을 가는 쟁기질이다. 쟁기질은 딱 한 번 잡아 봤는데 아버님이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단 2m도 갈기 전에 쟁기질을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절대로 쟁기를 잡지 못하게 했다. 일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장군까지는 지고 다녔는데 왜 쟁기질은 못 하게 했는지 알 수가 없다. 하긴 장군을 지었다고 하여 똥장군을 진 것은 아니고 물장군까지만 지고 다녔다. 

 

이처럼 일을 하던 나는 책을 좋아하여 힘들고 바쁜 일손에서도 친구들이나 헌책방에서 책을 구하다 읽고 있었다. 그 영향인지 어느 날부터 학교에 다시 가겠다는 생각으로 부모님을 졸라 2년 동안 일하고 고등학교를 다시 들어가게 되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생활도 하게 된 것이다. 그때 내 결심은 '내가 괭이나 낮을 잡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결심했으며 농사짓고 사는 우리 집이 창피하게도 느꼈었다.

 

그랬던 내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게 느끼게 된 것은 나이 70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욕먹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발버둥 치며 살다 정년이 되어 집안에 들어 안게 되니 또 다른 사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은 선배들로부터 퇴직 후의 생활을 들어왔고 퇴직 전 퇴직 후 생활을 위하여 교육도 받았지만 손수 체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누구나 직장에서 퇴직하고 나면 시원하면서도 섭섭함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시원함은 공직에서 맡고 있던 책임감에서 벗어났다는 기분일 것이고 섭섭함은 그동안 누려왔던 것을 내놓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퇴직 후 처음 몇 달은 식구들로부터 특별대우를 받는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제는 다리 쭉 펴고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살이 그리 쉽던가? 얼마 가지 못해 갈등은 또 싸이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서로 다른 생활을 해 왔던 부부다 보니 같이 붙어있기도 쉽지가 않다. 사사건건 서로 잔소리한다고 부닥치게 되고 밖에 나가보니 생소하기만 하다. 같은 생활을 했던 옛 동료들을 만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맨날 만나면 또 하나의 쳇바퀴가 되니 점점 몸은 늙어 가는데 거기에 맞는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퇴직하고 나서 보니 제일 부러운 것이 자영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퇴직이 없이 자기 힘 닫는 데까지 할 수 있는 일이 자영업이니 노년의 새로운 사회에 특별히 준비할 필요성이 없어 보인다. 과거에는 인생 70이며 거의 다 사라 젖는데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다 보니 새로운 고민거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이런 고민거리를 해결하려는 방법으로 내가 선택한 것이 '밭 가꾸기'라는 취미 생활이다. 퇴직 후 각자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생활한다. 젊어서 열심히 산 보람으로 먹고 입고 자는 것은 걱정이 없으니 그 만만 해도 부러울 건 없지만 어찌 사람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행복하려면 일거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밭 가꾸기였다. 괭이자루를 잡으면 성을 바꾼다고 했는데 성을 바꿀지언정 잡아야겠다. 이래 시작한 것이 농사였다. 농업경영 등록 체에 농업인이라는 등록도 하고 명함의 직업란에 농업경영인이라고 기재하고 다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는 나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친구들도 지금 뭐 하냐고 물어오면 "밭에 나가서 놀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한다. "어떻게 농사를 지어" "풀을 어떻게 매"하며 농사짓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이 말한다. 그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내가 그동안 중고등학교에서 교장을 하다 퇴직한 사람이 이니 무슨 농사를 지을 줄 알겠느냐는 식이다. 그러나 나는 농사일에는 자신이 있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있지만 어려서 부모님들에게 눈 너머로 배운 잠재적 교육과정이 몸에 밴 모양이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게 농사를 진다. 풀을 이겨내고 가뭄을 방지하기 위하여 비닐을 사용하는데 다른 사람들과 같이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비법으로 사용하여 농작물에 가뭄이 타지 않도록 한다. 풀을 매는데도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풀이 크기 전 싹이 트면 서양 괭이로 곡식에 붙을 주면서 긁어 버리니 풀이 살을 수가 없다. 이런 농법으로 심심풀이 1~2백 평이 아니라 1,500여 평이 넘는 밭을 관리하니 신기도 할 것이다.

 

요즘은 이처럼 농사를 짓는 나를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쾌 많이 나타났다. 그 친구들을 보면 대부분 어려서 가정이 나름대로 부유하여 농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거나 부모님이 농업에 종사하지 않고 다른 직업을 가 젖던 친구들이다. 늙어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다. 내가 씨앗을 뿌리고 가꾼 작물들이 자라고 열매는 맺는 것을 보면 신기도 하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내가 먹고 싶은 작물은 거의 다 자급자족하고 여분 생산물은 이웃에 나눠 주기도 하고 판매도 하는데 이제는 제법 농부로 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내 생활은 누구에게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볼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으며 몸이 힘들면 쉬고 여행을 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다니면서 하는 자유 직업일뿐더러 잘못한다고 나무랄 사람도 없고 다른 사람과 이해관계도 없으며 정년이 없으니 힘이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수시로 가족여행이나 산행도 한다. 이런 나를 친구들은 무척이나 부러워한다. 이런 노년의 내 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은 농부의 아들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농부였던 부모님들이 이렇게 고마울 줄은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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