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雪花

일릉 2018. 2. 14. 20:46

살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천국 같은 아름다움을 만났다. 매일 걷는 길이지만 계절 따라 달리 나타나는 자연의 모습을 봐 온 지가 4년이 넘었는데 오늘같이 아름다움을 느낀 것은 처음이다. 다른 날도 눈밭 속의 이 길을 걸었는데 그때는 왜 느끼지 못했을까? 신기도 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추운 줄도 모르고 아름다운 설경을 폰카에 담아 본다. 그리고 눈에 대한 지난날들의 추억이 머리를 스쳐 간다.


어린 시절 함박눈이 내리면 추운 줄도 모르고 친구들과 눈싸움을 한다고 한바탕 뒤 제비 하던 추억에 조금 커서는 눈사람을 만들며 누가 더 크고 예쁘게 만들었나 자랑하던 초등학교 시절을 지나 고등학교 시절에는 펑펑 퍼붓는 함박눈을 맞으며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다 조금 나잇살이나 먹으면서 첫눈이 내리면 어느 가수가 히트를 친 '안동역'의 노래 가사처럼 옛 애인을 떠올리는 날로 기억되기도 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바쁜 생활 속에 살다 보니 눈의 아름다움보다는 눈이 오면 추위를 걱정해야 했고 출퇴근 걱정에 눈 오는 밤은 잠을 설치기도 했는데 이제 세상 다 내려놓고 가진 것은 시간뿐인 사람이 되다보니 이처럼 눈이 아름다운 줄 몰랐다.


눈이 오는 날 창가에 서서 창밖에 쏫아지는 함박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세상 모든 지저분한 것들을 하얗게 덮어 덮어주는 신비로움 같이 내 마음속에 있는 지저분한 것도 다 덮어 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솜같이 포근히 싸이는 눈을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했는데 살다 보니 그렇게 아름답던 눈이 한동안 내 눈에 보이지 않다가 오늘 산책길에 나를 휘둥굴하게 만든 것이다.

평소 눈에 들어오지 않던 한세월 살다간 풀잎들이 새하얀 분단장을 한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해님이 질투하기 전 내 가슴에 담아야지.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누가 그릴 수 있을까? 자연만이 나에게 선사하는 풍경화가 아닌가? 남들이 보기 전 감상하고 또 감상해야지.

 


어느 임이 왔다 갔나 조그마한 여자분의 똑같은 발자국이 가기도 하고 오기도 했네. 참 부지런도 하지. 아무도 밥 지 않은 눈을 밟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걸었을까? 첫사랑의 임을 생각했을까? 아니면 제일 부지런 하다는 자만감에 빠져 그저 기쁨의 환상 속에서 즐거워하며 걸었을까? 혹시 추위에 떨면서 정신없이 걷지는 안 했는지? 어느 여인인가 상상을 해 본다. 발자국을 보니 노인네 발자국은 아닌 것 같고 뚜벅뚜벅 찍힌 자국이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네 발자국 같다. 


나뭇가지에 얼키설키 역인 눈이 어느 화가가 그려놓은 명화 중의 명화보다 더 정교하고 자연스러우니 걷던 발길 멈추고 한참이나 들여다본다. 아마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이만큼이나 얽히고설켰을까? 궁금도 하다만 얽히고설킨 것이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승화되었다.


지난해에 힘차게 살다간 갈대꽃에 세월의 무심함이 아쉬운 듯 조금 더 살다 가라고 애원이라도 하는 듯, 아니면 새로운 젊음을 가지라는 듯 아름답게 눈꽃으로 단장해 놓았네. 물끄러미 눈에 싸인 갈대꽃을 바라보며 나에게도 이처럼 새롭게 변모할 방법이 없을는지 지난 세월을 그려본다. 이제는 한세상 다 살은 늙은이가 무엇이 그리 아쉬워하는지 혼자 넋두리하며 모든 미련 다 버리고 훨훨 떠나가야지.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으로 돌아가 내 후손들이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이름 없는 야생화나 되어 자연의 아름다움에 동참해야지 하면서 눈꽃의 아름다움에 도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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