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거나한 채 마나님이 운전하는 조수석에 타고 오면서 오늘 하루를 생각해 보니 길기도 긴 하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하루 사이에 이런 많은 일이 일어났을까 신기도 하고 영 기분이 찝찝하며 속에서 열불이 난다. 세상이 아무리 지저분해도 이처럼 지저분할 수가 있을까? 육십 평생을 살면서 별별 일을 다 겪었지만 나와 전연 상관이 없는 일에 조기가 꾸러미에 엮이듯 엮여 들어간 듯한 기분이다.
오늘은 지역 단위 교장회의가 있었다. 평소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교장회의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교감 선생님을 보내고 나는 학교에서 근무하는 성격인데 오늘은 지역 교장단에서 자치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회의 날이다. 평소는 일과가 끝나고 오후에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가볍게 회의를 하고 상반기에 정년퇴직하는 교장 선생님이 두 분이 계셔 송별연도 같이 하기로 되어 있었다.
간단히 회의가 끝나고 송별연이 시작되었다. 회장님 인사와 퇴직하는 분들의 인사말이 끝나고 총무를 맡은 교장 선생님의 건배사에 따라 식당 주인이 특별히 서비스라고 내 논 검붉은 복분자 술잔을 입에 댄다. 평소 같으면 한입에 쓱 마시고
“거참 술맛 한번 기차다”고 했을 참인데 오늘은 왼 일인지 술이 썩 내키지 않아 가볍게 입만 대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니 앞에 앉아있는 송 교장이
”어 김 교장 웬일이야? 술잔을 꺾고”
“글쎄, 운전도 해야 하고 별로 생각이 없네.”라고 웃으며 응수한다. 정년퇴직하는 분들의 권유로 사양하면서 복분자 두 잔은 마신 것 같다. 이렇게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자리가 무르익어 갈 때 호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울린다. 나는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가면서 핸드폰을 열어보니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방 밖으로 나가면서
“여보세요.” 하니
“태봉 중학교 김광석 교장 선생님이시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저는 태진 검찰청 수사관 박병두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한다. 나는 머릿속에 아차 무슨 사건이 터진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는데 침착하게
“아 그러세요. 무슨 일이세요.” 하니
“전에 청량 고등학교에 근무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청량 고등학교에 근무하실 때 일 때문에 그런데 영감님이 빨리 처리하라고 해서 오늘 중에 우리 사무실로 출두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한다. 나는 기분이 확 상했다. 무슨 일인가는 모르지만 밑도 끝도 없이 검찰청에 출두하라니 어이가 없다. 머릿속으로 ‘왜 내가 거기를 가. 잘못이 있으면 제 놈들이 영장을 들고 오겠지!’ 하면서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오늘은 시간이 될 것 같지 않은데 지금 나와 있으니 이따 학교에 들어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확 상했다. 전 학교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청량 고등학교는 내가 교감으로 재직하면서 많은 변화를 일으킨 학교다. 시내 변두리에 있는 면 단위 학교지만 태진시에 있는 일반 고등학교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학교였다. 역사와 전통이 깊은 만큼 선배들도 사회적으로 많이 진출해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도심의 학교가 커지자 통학 거리가 먼 면 단위 학교는 자연스럽게 쇠퇴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신입생 유치가 어려워 시내에 있는 일반 고등학교는 물론 실업계 고등학교에 입학 전형이 끝난 후 갈 곳이 없는 학생들이 진학하는 학교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해마다 신입생 유치를 3월 말까지 하는 학교로 전락했다.
태진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승진하여 청량고등학교 교감으로 발령을 받아 가서 보니 같은 시내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이 학교가 이렇게 낙후된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리고 면 단위 학교니까 학급수도 잘해야 학년 당 3~4학급 규모나 되겠지 했는데 한 학년에 8개 반씩 24학급으로 편성된 큰 학교며 병설인 중학교는 교감 선생님이 근무하지 않는 5학급의 소규모 학교와 같이 있었다.
내가 이 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면서 많은 변화를 주고 떠났었다. 교감으로 부임하여 학교를 보니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로서는 교육환경이 너무나 열악했다. 병설학교인 청량 중학교 출신의 몇몇 학생과 다른 지역에서 태진시로 전학 하려다 실패해서 온 학생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공부와 담을 싼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결석 지각은 물론 폭행, 절도 선생님과 실랑이는 물론 심지어 여선생님 머리채를 잡아채는 등 사건 사고가 끝날 날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이 대부분이고 선생님도 한계에 찾는지 자는 학생을 깨우는 것이 아니라 천장을 보며 수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 학교에 2년을 근무하면서 많은 변혁을 주고 떠났다.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로서는 한계점이 다다른 학교라 생각하고 있을 때 교육부에서 실업계 고등학교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추진하고 있던 통합형 교육과정 시범학교를 받아들였다. 이 교육과정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하는 것으로 6년이란 긴 기간 동안 연구하여 성공하면 실업계 고등학교로 확대하려는 실험 학교였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 많은 재원 투자는 물론 인적 자원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연구학교였다.
이 연구학교 공모를 위한 공문이 왔을 때 학교장은 물론 대부분 선생님이 우리 학교는 어렵다고 반대하는데 나는 굽히지 않고 학교장과 선생님들을 설득하여 전국적으로 6개 학교만 선정하는데 그 중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5개 학교는 낙후된 소규모 학교였으나 규모가 큰 일반계 고등학교는 우리 학교가 유일했다. 그러다 보니 2년이란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게 바삐 살았다.
신입생 모집을 특차 전형과 전국단위로 확대하여 연구학교 유치로 변형될 학교 청사진을 대대적으로 홍보한 결과 해마다 3월 말까지 유치하던 신입생 모집이 2대 1이라는 경쟁력이 있는 학교로 바꾸었다. 그리고 교육과정을 1학년은 공통과정을 교육하고 2학년부터는 일반 과정과 실업 과정으로 구분하여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전공을 선택할 수 있도록 편성했다. 그리고 실업 과정은 다시 애니메이션과 조리, 미용으로 구분하여 전문과정을 이수할 수 있도록 편성했다.
그리고 이런 교육과정을 운영하기 위하여 교육부와 도 교육청의 지원으로 실습 동을 신축하고 신입생 유치가 전국 단위로 확대되어 타시·도에서 오는 학생들을 위하여 기숙사도 신축할 수 있도록 재원을 확보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도 교육청과 마찰도 있었고 선생님과 학부모 사이에도 마찰이 종종 나타났다.
내가 이 학교에 부임한 첫해는 연구학교 유치와 새로운 교육과정 편성을 위한 준비와 신입생 유치로 정신이 없었고 2년 차는 새로운 실업 과정을 위한 시설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학교가 급변하다 보니 교사들 사이에도 이해관계가 나타나 잡음이 계속 나타났으며 편하게 하루를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거기에다 2년 동안 교장 선생님을 세 분이나 모시는 상황이 나타났는데 세분 모두 개성이 강하고 학교 경영 방침이 달라 교장과 교사들 중간에 있는 교감으로서는 한계에 부닥치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처음 연구학교를 유치할 때 10여 년 남짓 남은 교직 생활을 이 학교에서 마친다는 조건으로 심사위원들에게 강하게 주장하여 심사위원들이 교감 선생님의 열정을 봐서 우리 학교에 연구학교를 지정해 준다고 했는데 스스로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나는 많은 선생님과 학교장이 만류했으나 다른 학교로 내신을 내기로 결심했다. 내신서를 작성하여 도 교육청 인사담당 장학관에게 제출하니 그는 나를 보고
“청량 고등학교는 어떡하고 떠납니까?” 하면서 내신서를 되돌려 준다. 나는
“제가 떠나야 연구학교 운영이 원만할 것입니다. 그동안 교사들과의 관계가 너무 복잡하여 교감으로서는 한계점이 다다랐습니다.” 하니
“그러세요.” 하면서 받아 준다. 이렇게 해서 이 학교에 부임한 지 2년 만에 6년 차 연구학교를 1년만 추진하고 떠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교장에 승진하여 이웃에 있는 시의 면 단위 중학교 교장으로 2년을 근무하다 다시 태진시로 내신을 신청 했는데 도 교육청에서 발령을 낸 곳이 다시 청량 고등학교였다. 후에 교육감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많은 사람이 청량 고등학교는 내가 가야 6년 차 연구학교를 마무리 지을 수 있으며 그 학교의 교육과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라고 하며 추천하여 발령을 냈다는 것이다.
내가 이 학교를 떠난 지 4년 만에 경영자로 승진하여 되돌아온 것이다. 와서 보니 중학교가 인근 사립중학교를 통합하여 10학급이나 되는 면 단위 학교로는 제법 학생이 많은 학교로 변하였으며 고등학교도 학급 수는 변화가 없었으나 교감 때 추진하던 실습 동과 기숙사가 나타나 있으며 제법 그럴듯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준 특성화 학교가 되어 신입생 유치에 걱정이 없었고 학생들 수준도 상당히 좋아져 안정된 학교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나 연구학교를 처음 유치했던 사람들이 다 떠나 우리 학교 교육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초기에 추진하던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하긴 그동안 교장이 세 사람, 교감도 두 사람이나 바뀌다 보니 교육과정이 6년 간 교육감의 승인으로 운영되는 한시적인 교육과정이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즉 1학년은 연구학교 교육과정이 적용되지 않는데 그대로 적용하고 있었으며 신입생 유치도 법에 어긋나게 유치한 결과가 되었다. 나는 모순점을 지적하고 직원회의와 학교운영위원회를 거친 다음 학생과 학부모 동의를 얻어 학교 교육과정 자율권을 도 교육감으로부터 3년 더 연장 승인을 얻어 합법화 시켰으며 6년 차 마지막 연구학교를 마무리 짓고 특성화 고등학교로 발전할 수 있도록 추진해 나갔다.
그리고 교사(校舍)가 50년이 넘어 너무 날아 개축을 추진하였다. 원래 중학교 건물이 가장 오래되었으나 내가 교감 시절 가운데 있던 중학교 교사(校舍)를 새로 건축한 고등학교 건물인 제일 뒷동으로 바꾸었는데 이 건물은 아직 새 건물이라 그대로 두고 고등학교 건물을 BTL(Build Transfer Lease : 임대형 민자 사업으로 민간이 시설을 건설하되 운영권은 정부가 소유하는 형태의 사업을 뜻함)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이 사업은 전임 교장이 추진하다 떠나자 도 교육청에서는 내년에 추진하자고 발뺌하면서 꺼리는데 과감하게 밀어붙여 추진하게 된 사업이다.
나는 몇 차례 직원회의와 동창회 의견을 들어 고등학교 교사가 있는 1동과 2동을 헐어내어 그 자리에 중학교 운동장을 만들고 넓은 운동장에 24학급 인문계 고등학교 교사와 강당 겸 식당을 신축하고 고등학교 운동장을 따로 만들어 주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완전히 분리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추진했다. 그 이유는 고등학교와 병설인 중학교는 선생님이나 학생들이 규모가 큰 고등학교에 기가 죽어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역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고학년이 되면 공부 좀 하고 가정형편이 조은 학생은 시내 중심권 학교로 전학하여 중학교 신입생이 점점 줄고 있어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고등학교도 점점 낙후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적성을 살려주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 전국기능대회에 참가할 선수를 뽑는 도 기능대회에서 요리 분야와 제빵 분야에서 각각 1등, 미용 분야에서 3등을 차지했다. 그리고 풍물부는 각종 전국대회에 나가 최우수 아니면 우수상을 받아 왔고 양궁부도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을 하나 받았으며 학생 봉사활동대회에서도 최우수를 받는 등 지방 신문에 수시로 학교가 소개되었다. 이처럼 내가 교감 때 근무하던 학교와는 완전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나는 힘 바람이 나 각 대학은 물론 일본 동경에 있는 미술학교와 뉴욕 한인협회와도 자매결연을 맺혀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유치와 진학 및 진로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 외에도 도 교육청으로부터 특별 교부금을 지원받아 새로운 양궁장 부지를 매입하도록 했으며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각 종 특별실을 개선해 주었다.
이처럼 정신없이 일을 추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3년뿐이 남지 않은 정년을 집이 가까운 시내 중심 학교로 가야 하나 아니면 이 학교에서 정년을 맞이해야 하나 고민 하면서 한참 공사 중인 BTL 사업이 마무리 되면 생각하자고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2년 차 되던 여름 방학 어느 날 출근을 하는데 자동차 블루투스가 울려 받아 보니 도 교육청 인사담당 장학관 전화였다. 그의 전화는 내가 나이도 먹고 했으니 집 가까운 시내 중심 학교로 옮길 생각이 없냐는 것이다. 한편 반갑기도 했으나 추진하고 있던 일들이 많아 생각 좀 해 보자고 하고 끊고 보니 뒤가 찝찝하여 다시 전화를 연결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학생들을 위해 일본 동경에 나가 있는데 발령이 난 모양이다. 행정실장과 같이 간 선생님이 어찌 된 일이냐고 해서 나는 웃으며 설마 했는데 정말로 옮겨놨다며 사전에 연락이 있었다고 했다. 내 후임은 나와 교감 연수동기로 배경이 있는지 교장연수는 나보다 늦게 받았는데 도 교육청 장학관도 하고 변두리 교육장을 거처 우리 학교로 온 것이다. 나는 속으로 이 친구가 밀고 드러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 있는 태봉 중학교로 전출해 왔는데 무엇을 잘못했기에 검찰청에서 오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많은 일을 추진하다 보니 혹시 나 모르는 사이에 행정실이나 교무실에서 문제가 있을 만한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특별히 문제가 될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검찰청에서 오라고 한다고 무조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꼭 필요하면 다시 연락이 오겠지 하며 송별 자리로 들어왔으나 기분이 좋을 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