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에 등산한다든지 혼자 산책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지난날 추억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 스쳐 가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전생에서 한 번쯤 만난 인연이 있었던 사람같이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인데 나에게는 왜 그리 자상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터키 여행 도중 도하 공항이다.
내가 서방인지 남방인지와 이별 한지도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 철도 모르고 고등학교 시절 연애한 사람과 일찍 결혼하여 딸 아이 하나 두고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놈의 남자가 도박에 미쳐 집안일에 대해서는 날 몰라라 하는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그래도 나는 시간이 되면 돌아오겠지 하면서 딸아이를 열심히 돌보며 그놈 노름 돈을 대주며 살았다. 생활비는 고등학교 때 배운 암산으로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조그마한 암산 학원을 차려 그럭저럭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서방이란 놈이 도박에 미쳐 나도 모르게 학원 보증금마저 빼가는 일이 벌어 젖다. 결국 아버지와 오빠가 나서 이혼을 시켜 줘 딸아이와 같이 고향을 떠나 청주로 와서 종합병원 병리실에서 근무하며 살고 있었다. 이제는 딸아이도 성장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아 집을 떠나자 혼자 사는 처지가 되었다.
혼자 살다 보니 남자들 유혹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남편에게 혼난 나는 재혼이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모든 남자가 다 도둑놈같이 보이고 여자를 홀리는 늑대 같은 생각이 들었으며 술이나 마시고 도박이나 하는 사람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어울리는 사람들도 혼자 사는 여자들이며 그들과 그룹이 되어 종종 산에도 가고 여행도 다니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3월 초로 기억된다. 이른 봄 어느 날 내 핸드폰에 대전에 있는 노랑풍선이란 관광회사에서 급하게 저렴한 가격으로 터키 여행객 네 사람을 모집한다는 문자가 들어 왔다. 무심코 들여다보니 정말 가격이 저렴한 상품이었다. 가까이 지내는 언니가 작년에 터키를 다녀와서 한 번 가볼 만한 곳이라고 입이 마르게 자랑하여 기회가 다면 꼭 한 번 가 봐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직장에서 병원이 잘 돌아가지 않는지 사무장이 자주 짜증을 부리며 휴가를 줄 테니 쓰고 싶으면 말을 하라고 한다. 나는 지난해까지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며 모임도 같이했던 서울로 이사 간 민숙희가 생각났다. 그녀는 성격이 소탈하고 꾸밈이 없으며 서방은 경기도 군포에서 자동차 정비업을 하는데 집에서 나가 있어 서로 떨어져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나이도 별로 많지 않은데 아이를 일찍 두어 큰아들은 결혼하여 50대 초반 나이에 할머니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한참 인기를 끌고 있는 터키 여행 상품 싼 것이 나왔으니 같이 가자고 하자 처음에는 거절하다 내가 자꾸 권하자 좋다고 하여 둘이 나선 것이다. 여행 당일 날 인천공항에서 오후 6시에 미팅이 있었다. 청주에서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조금 서둘러 공항에 갔다. 숙희에게 환전도 하고 전화 로밍도 하자며 공항에서 오후 5시에 만나자고 약속한 것이다. 오후 5시 가까이 되어 미팅 장소에 도착해 보니 뚱뚱하며 돈깨나 있어 보이는 노인네 한 사람만 나와 있었다. 조금 있다 숙희가 오면서
“일찍 왔네.” 한다.
"청주에서 몇 시에 나섰어?"
"한 시 반" 하니 먼저 와 있던 노인네가
"청주서 왔소. 나는 대전에서 왔는데." 한다.
"혼자 오셨어요."
"그렇게 됐네요."
"그럼 잘 되었네요. 청주나 대전은 이웃이니까 우리랑 같이 다니지요." 숙희가 먼저 동행인이 되자고 청한다.
"그래요. 잘 되었네요." 노인네도 좋은가 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일행은 세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인천공항에서 직접 이스탄불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저가 여행이라 그런지 도하에서 갈아타는 비행기였다. 우리는 이스탄불을 가기 위해 도하 공항에서 세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공항 내에서 인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데 설명이 끝나자 나이가 지긋한 남자 한 사람이 가이드에게
"내 룸메이트가 어느 분인가 소개해 주쇼." 한다. 그러자 가이드가
"참 잠깐 기다리세요." 하면서 우리 쪽을 바라보며
"이분인데요. 인사하세요." 하면서 우리 옆에 서 있는 대전에서 혼자 온 분을 소개한다. 두 사람이 인사하는데 그 사람은 키도 크고 균형 잡힌 몸매로 머리는 염색이 벗겨지고 있는지 희끗희끗하게 보이는데 인상이 온화하며 점잖게 보였다. 그리고 천안에서 왔단다. 대전에서 온 노인네가 반가워하면서 우리를 그 사람에게 소개한다.
"이 분들은 청주에서 왔는데 대전, 청주, 천안은 바로 이웃이니 서로 잘 되었네요." 한다. 아마 이 남자들도 우리와 같이 대전 노랑풍선 관광회사에서 모집한 저렴한 상품으로 온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두 남자가 서로 인사를 하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전에서 온 사람은 옛날에 충남 도청에서 국장으로 근무하다 퇴직했고 천안에서 온 사람도 고등학교에서 교장을 하다 퇴직한 사람이란다. 역시 풍채에서 풍기는 대로 배움과 학식이 갖추어져 있는 돈깨나 가진 사람같이 느껴 젖다.
우리 네 사람은 부담 없이 어울렸다. 한 분은 아빠와 같고 한 분은 큰오빠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숙희는 성격대로 거리낌이 없었다. 우리 네 사람은 여행을 같이 온 일행인 양 같은 식탁에서 식사한다든지 관광할 때 자연스럽게 일행이 되어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같이 포즈도 취하게 되었다. 식사 도중에는 맥주 한 잔씩 나누어 먹기도 하고 보스포리스 해협에서는 해변 주변 유적지에 흠 북 도취되어 있는데 천안에서 온 사람이 찻집에 들어가 차 한 잔 마시자며 차집으로 안내한다.
처음은 사진 찍을 때 네 사람이 같이 서면 숙희가 먼저 천안에 있는 교장이란 사람 옆자리를 차지해 나는 자연스럽게 대전에서 온 국장이란 사람 옆자리에 섰다. 그리고 대화를 할 때도 자연스럽게 둘로 나누어져 걸으면서 관광을 했다.
그러다 관광 3일 차 오전에는 데린쿠유 지하도시를 관광하고 오후에 괴레메 마을을 관광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우리 관광 일행은 오후에 괴레메를 관광하고 두 패로 나누어 젖다. 한패는 자비 부담으로 열기구를 타러 가고, 남은 사람들은 괴레메 마을에서 자유 여행을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여행을 떠나올 때 철저하게 옵션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어 참여하지 않았는데 숙희도 고소 공포증이 있다며 열기구 타는 것을 신청하지 않았다. 우리 일행 중 대전에서 온 사람만 열기구 신청을 한 것이다. 나는 숙희와 괴레메 마을에 펼쳐진 관광지를 구경하면서 이 상가 저 상가 쇼핑을 하고 돌아다녔다. 천안에서 온 사람은 혼자 어디로 갔는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얼마 동안 시간이 지나 관광을 마치고 관광버스가 있는 곳으로 가는데 저쪽 언덕에서 그 사람이 혼자 나타난다. 우리는 그를 반갑게 불러 같이 대화를 나누며 모임 장소인 관광버스로 왔다.
차에 올라와 쉬려고 하는 데 갑자기 숙희가
“내 핸드폰이 안 보이네.” 하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차를 타고 있던 일행들이 모두 한마디씩 한다.
‘누가 손댄 것 아냐“
“관광객들 핸드폰을 훔쳐 다 판다는데?”
“잘 생각해 봐?”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다음 주에 태국에 간다고 오지 않겠다는 걸 내가 억지를 부려 데려왔는데 나 때문에 백여만 원이나 가는 핸드폰이 없어졌다니 걱정이 앞섰다.
“얼른 나가 찾아보자. 우리가 다닌 곳을 한번 둘러보자.”고 재촉하자 원래 늑대인 숙희는
“찾을 수 있겠어?” 하면서 태평한 태도다. 나는 옆 좌석에 있는 김 교장을 바라보니 그는 여자들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지 표정이 별로 없다. 마음속에서 조금 원망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그래도 며칠간 남들이 이상한 눈길을 보내면서 쑥덕거리는 데도 같이 동행해 줬는데 막상 일이 생기니 몰라라 하는 기분이 들었다. 대전에서 온 김 국장이 있었으면 앞장서서 나섰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숙희와 나는 차에서 내려 우리가 쇼핑하고 다닌 상가를 돌아보았다. 쾌 여러 곳도 다녔다. 그러다 두 갈래 길이 나타나 나는 숙희에게“너는 나머지 상가를 돌아봐. 나는 관광하던 언덕을 돌아볼 테니?” 하면서 헤어져 혼자 넓은 괴레메 마을 언덕을 돌아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김 여사, 잠깐 기다리세요.”라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그 사람이 바로 내 뒤에 서 있다. 우리는 그가 차에서 내려 뒤에 따라다닌 것을 알지 못하고 허둥대고 다닌 모양이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는 무표정하게
“민 여사 전화번호를 불러 보세요.” 한다. 나는 의아해하며 전화번호를 불러주자 그는 자기 핸드폰에 번호를 찍고 하는 말이
“내가 계속 핸드폰을 켜고 있을 떼니까 다닌 곳을 돌아보면서 핸드폰이 계속 울리는 사람이 있나 살펴보세요.”라고 한다. 언뜻 그럴듯하다는 생각을 하며 이곳저곳을 헤매는데 그는 여유롭게 뒤에서 천천히 따라 온다.
바위 속에 만들어 놓은 동굴 찻집과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괴레메 마을 언덕을 얼마 동안 헤매는데 앞에 있는 가무잡잡한 젊은 터키인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 소리가 계속 울린다. 그러자 그 청년은 핸드폰을 꺼내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자 의심의 눈초리를 의식했는지 손에 든 핸드폰을 보이면서 무어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얼른 핸드폰을 보니 그것은 바로 숙희가 잃어버린 핸드폰이었다. 나는 반가워하며
“어 이거 내 친구 것인데? 하자 그는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주인을 찾아주고 싶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나에게 건네준다. 그러고 있는 사이 그 사람이 우리 옆으로 다가오자 터키 청년은 얼른 자리를 피한다. 혹시 도둑으로 오인했을까 봐 당황한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았다. 김 교장은 나에게 터키 청년에게 사례금이라도 조금 주지 그랬냐고 하는데 나는 아차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역시 신사는 신사인 모양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찾은 우리 두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숙희를 찾아가면서
“어떻게 전화 걸 생각을 했어요.” 하자
“평생 학교에서 직원들과 학생들 사건·사고만 처리하고 살았는데 이런 거야 사건입니까?”하는데 믿음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상가에 있는 숙희를 만나자 그는 핸드폰 잃어버린 것은 벌써 잊었는지 쇼핑에만 열중하고 있다. 핸드폰을 돌려주면서
“교장 선생님 덕분에 찾았어.”라고 하며 돌려주었는데도 별로 반응이 없으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래.”하면서 받아 챙긴다. 오히려 내가 무안했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사람은 역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 2 부(천사 미소) (0) | 2020.02.06 |
---|---|
아들 1부(학춤 1) (0) | 2020.01.17 |
농부 아들 1. (0) | 2019.05.28 |
흔적 1. (0) | 2019.05.06 |
히말라야 1. (0) | 2019.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