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혼
새벽이 되면서 깜박 잠들었나? 눈을 떠 보니 남쪽 창문이 훤하게 밝아 오고 있다. 머리맡에 있는 말이 많은 여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 조용하고 옆자리 노인네는 조용히 눈을 뜨고 천장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창틀 옆에 있는 침대는 석 달째 비어 있다.
내가 저쪽 방에서 이쪽 방으로 옮겨 온 지도 벌써 다섯 달이 지나가고 있다. 이 방 사람들은 저쪽 방보다 나이가 많고 혼자 활동할 수 없는 사람만 사용하는 방인 모양이다. 아마 죽어야만 이 방에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이 요양원에 들어온 지도 벌써 5년이란 세월이 더 흘러간 것 같다. 영감이 죽자, 그동안 살던 집에서 둘째 아들과 같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내가 딸네 집에 가 있는 동안 딸들이 그 집에서 나와야 한다면서 내 짐을 다 빼내 왔다.
이 집은 둘째 아들 집으로, 집터는 원래 내 영감 논이었는데, 없는 집에 자식이 많다 보니, 밑에 있는 딸들을 가르치고 출가시키는데 둘째 아들이 벌어 놓은 돈을 가져다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액수가 쾌나 되었다.
그러자 나이는 먹어 몸은 늙어 가는데 둘째 아들에게 미안하여 그동안 사용한 돈 대신 땅을 넘겨주고 아들이 여기에 2층으로 공장 겸 살림집을 지어 아래층은 우리 내외가 살고 2층은 둘째 아들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살던 집은 팔아서 아들이 집을 짓는 데 보태 쓰라고 주었다.
그러다 영감이 죽자, 아들과 딸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집에서 나와야 한다며 나를 둘째 딸네 집으로 옮겨 놓더니 얼마 있다가 막내아들이 방을 하나 얻어 줘서 혼자 살게 했다. 그러면서 큰딸이 나를 보살펴 주었다.
영감이 살아 있을 때 종종 둘째 아들과 막내아들 사이에 갈등이 나타났는데 영감은 막내아들 편을 들곤 해서 그런지 둘째 아들과 영감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영감 생각은 밥술이나 먹고 사는 둘째 아들보다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은 막내아들이 불쌍해 보였나, 아니면 자기가 막내아들이라 막내아들을 감싸 주었나 알 수는 없지만, 막내아들 때문에 몇 차례 둘째 아들과 큰소리가 나더니 둘째 아들은 저희 아버지를 보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러다 영감이 죽자 이런 사달이 나타나게 된 모양이다.
이제는 몸도 쇠약해져 혼자 일어날 기력도 없었다. 침대에 누운 채 밝아 오는 창틀만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창문에 처진 커튼 사이로 월성산 봉우리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월성산 봉우리가 내가 태어난 계룡산 자락에 있는 연천봉으로 변하더니 내 어린 시절이 어른거리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한 방울 볼을 적셨다. 지지리도 기구한 팔자인 모양이다. 시골의 가난한 목수 집 10남매 큰딸로 태어나 안 해 본 것이 없이 살아왔는데 이제는 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어 이 작은 방에 갇히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팔자가 일하라는 팔자인지 7살도 되기 전부터 어머니가 밭에 일하러 가면 어린 동생을 보면서 부엌에 들어가 보리쌀을 삶아 놓곤 했으며 앞마당에 있는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동생들 기저귀를 빨기도 했다. 여느 날인가는 아버지와 같이 큰아버지가 마루에 앉아서 이야기하시다 내가 빨래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허 허 그 녀석 빨래하는 손이 야무지네.” 하면서 칭찬했다. 7살 먹은 꼬마 계집애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빨래하는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 욕심이 많아서 그랬는지 3살 터울로 동생이 태어났다. 바로 밑에는 남동생으로 똑똑했으며 그다음에도 아들을 낳았으나 채 돌도 지나기 전에 죽은 다음 계속해서 딸만 넷을 낳고 아들을 낳았는데도 아들 욕심이 남아 또 딸을 둘이나 두었다. 그러다 보니 밑에 두 동생은 내가 출가한 후에 태어나서 내 아들보다도 나이가 어렸다. 그러나 우리 부모는 아들 복이 없고 딸 복만 있었는지 작은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을 다니다 갑자기 병으로 죽어 3남 7녀가 1남 7녀를 두게 되었다.
시댁도 마찬가지로 5남 3녀를 둔 집안으로 내 영감은 그중 막내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7남매를 둔 것도 시집과 친정의 영향을 받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16살 때 같은 마을에 사는 김 진사 댁 막내아들한테 시집을 왔는데 신랑이란 사람은 20살이나 먹었는데도 숫기가 없었나, 아니면 같은 마을에서 자란 나를 어린 여자애라고 생각했나 결혼하고 근 1년이 가깝도록 내 방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내가 첫 아이를 낳은 것은 18살로 시부모를 모시고 세 동서가 한집에 살 때였다. 시아버지는 5형제를 두었는데 위에 아들 둘은 결혼시켜 내보내고 밑에 아들 셋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는 셋째아들과 한집에 살면서 넷째는 옆집에 살게 하면서 한쪽 울타리에 문을 만들어 같은 부엌을 사용하게 했으며. 막내인 우리는 시아버지가 사는 집 사랑방에다 신혼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한 부엌에서 젊은 세 동서가 같이 살림하는 꼴이 되었다.
나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야무지고 얼굴도 예쁘장해서 그런지 시아버지 사랑을 손윗동서들보다 많이 받은 것 같았다. 거기다 같은 해 같은 달에 한집에 사는 셋째 동서는 딸을 낳고 나는 아들을 낳자 더 사랑을 받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날인가는 시아버지가 내 아들을 업어 주려고 시어머니에게
“아기 포대기 좀 주소” 하자 시어머니가
“포대기는 다른 아기 없고 나갔는데”라고 대답하자 화가 난 시아버지는
“저기 가서 새끼줄 한 발 끊어 오거라” 하며 아기 포대기를 하나만 만들어 같은 집에 사는 동서 딸과 같이 사용하게 만든 시어머니를 혼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이 녀석이 돌도 지나기 전에 몸에 종기가 생겨 죽을 고비를 몇 번씩이나 넘기며 내 애간장을 태웠는데 그 종기가 무슨 병인지 봄과 가을만 되면 아이 몸 전체에 생겨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괴롭혔다. 종기에 시달리던 큰아들이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이다. 아이 몸에 난 종기를 치료하려고 검은 고약을 온몸에 수시로 부쳐 주다 보니 내 옷에 약이 묻어 검게 되었다. 나는 옷이 더러워 새 옷으로 갈아입으니까 이 녀석이 제 어미가 아니라고 생떼를 부려 새 옷을 벗고 다시 고약이 묻은 더러운 옷을 입고 젖을 먹이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 큰아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르신 일어나셨어요.” 하면서 요양원 선생이 웃으면서 들어왔다.
“이 선생 저 커튼 좀 활짝 열어 줘” 하자 그녀는 커튼을 걷어 놓고 내 침대를 일으켜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아준 다음 바로 식사를 가져오겠다며 나갔다. 침실이 조용해지자 다시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는 창밖을 응시하며 지난날의 추억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둘째 아들을 낳고 두 달도 채 되기 전에 한국동란이 일어났다. 한국동란은 내 주변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줬다. 전쟁이 일어나자 젊은 남편은 군대에 갔으며, 남편의 바로 위 형은 어느 날 장에 갔다 오다 좌익 청년들에게 끌려가 변을 당했고, 그 후 1년 만에 부인마저 모내기하다 논에서 쓰러져 죽었다. 그러다 보니 죽은 형님네 두 딸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에서 눈치를 보며 사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시부모는 자기 집 옆에 있는 넷째 아들 집이 비자 어린애만 둘을 데리고 사는 나를 그 집에서 살게 했다.
군대에 간 남편은 한번 잘 있다고 안부 편지가 오더니 그 후 소식이 끊어졌다. 남편 소식이 끊기고 1년 가까이 지나자,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가 매몰찼다. 혹시나 아들이 잘못되었나 싶어서 그랬는지 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화를 내며 욕을 퍼 붙었다. 한 번은 큰아들이 칭얼대어 혼을 내는데 언제 왔는지 내 뒤에 와서
“저년이 저리 독하니 서방이 안 오지” 하면서 남편의 소식이 없는 것이 내 탓인 양 욕을 퍼붓는가 하면, 친정이 이사하게 되어 이삿짐 날려다 주다 몸살이 났나 몸이 안 좋아 며칠 쉬었다 왔더니 서방도 없는 집에 왜 왔냐며 친정에 가서 살라고 욕을 해 퍼부었다.
이렇게 시어머니와 동서 밑에서 혹독한 시집살이를 3년씩이나 했다. 20대 초반의 젊은 년이 독수공방하는 괴로움을 시어머니는 왜 모를까? 원망도 많이 하면서 밤이면 아들을 재워놓고 혼자 울은 적도 많았다. 참 신기한 것은 같이 살 때 그리 무뚝뚝하고 정을 몰랐던 남편이 그렇게 그리워질 줄 미처 몰랐었다.
남편 소식이 내 귀에 들어온 것은 전쟁이 끝나고 1년쯤 뒤에 들려왔다. 그사이에 한 번은 순경이 와서 나를 아랫마을 외딴집에 가두어 놓고
“아줌마, 남편이 언제 집에 왔다가 갓 소”하며 다그쳤다. 나는 겁났지만
“그게 무슨 말이래요”라고 반문하니
“이 아줌마 겁이 없네, 지금 서방 어디 있냐고?” 하며 구두 신은 발로 마룻바닥을 힘껏 밝으며 큰소리로 겁을 줬다. 나는 사실 남편이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우리 애 아빠 살아 있어요.” 하고 반문하자
“어~, 이 아줌마가 한 수 더 뜨네. 집에 왔다 갔잖아~.” 나는 속으로 내 남편이 살아 있는데 도망친 모양이란 것을 눈치챘지만, 시치미 띠고 겉으로는 무서웠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남편이 살아있다는 생각에 안도하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그날 나는 순경들한테 창문이 밝아 올 때까지 밤새 시달리다 날이 밝아지면서 풀려났었다.
그들은 밤새 나를 윽박질렀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그가 군대에 간 다음 편지 한 장 오고 소식이 없습니다.”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하자 저희끼리 담배를 피우며 하는 소리가 얼굴은 예쁘장하니 체격도 조그만 여자가 쾌나 매몰차다고 쑥덕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시어머니의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그전까지만 해도 막내아들이 잘못되었나 했는데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신한 모양이다.
그 후에도 군인들이 한 번 왔다 가고 순경이 또 한 번 왔다 갔지만 모두 빈손으로 돌아갔다. 사실 나도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반년쯤 지나자 또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정말로 잘못된 것이 아닌가? 애를 태우고 있는데 6개월이 더 지난 후에야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우리 집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읍 소재지 마을에 숨어서 살고 있었다.
요양사가 아침밥을 챙겨왔다. 아침밥이라야 죽 반 공기 남짓한데 안 먹을 수도 없고 요양사가 수저로 떠먹여 주는 척하다 보면 끝나는 식사가 내 식사다. 이제 죽었으면 한 것이 어제오늘이 아니고 벌써 몇 년째인가. 그러나 내 목숨이 질긴 모양이다. 식사가 끝나고 요양사가 무슨 약인지 먹여주고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잡고 양치질해 준 다음 물로 헹구란다. 그러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쉬라고 하며 나갔다.
다시 조용해지자, 침대에 누운 채 잘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창밖을 응시하자 다시 영감의 그림자가 눈에 어른거렸다. 그는 군에서 1·4후퇴 때 중공군에게 부대가 전멸하자 겁이나 한강을 헤엄쳐 도망했으나,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20km 정도 떨어진 고장에서 숨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살고 있었다.
내가 남편을 다시 만난 것은 헤어진 지 5년 만이었다. 그 사이 큰아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 2학년에 다녔고 아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작은 아들은 5살이 되었다. 이사 가는 날 우리는 마을 사람들이 모르게 새벽에 간단한 살림살이를 챙겨 줄행랑을 친 것이다.
그리운 남편을 다시 만났지만, 고생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남편은 그동안 마을의 이장네 집에서 이름도 바꾸고 숨어 살면서 일을 해 주고 있었다. 이장은 남편보다 세 살 정도 더 많은 사람으로 둘째 시숙의 큰아들과 중학교 동창생이란 사람이었다. 이장은 중학교 동창이면서 군청에 다니고 있는 친구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남편을 숨겨준 모양이다.
남편은 비록 숨어서 살았지만, 풍채가 바르고 힘이 좋아 이장네 집에서 일을 잘한다고 인정을 받았고 이장네 집에서도 군청에 다니는 조카 덕인지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도 예쁘장하면서 일도 야무지게 하는 나는 바로 이장네 집 식구에게 인정받게 되었다. 주인집에 행사만 있으면 도맡아서 내가 일을 해 줬다. 원래 시댁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동서들과 같이 살았기 때문에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집안에 큰일을 척척 해내어 친정어머니보다 더 나이가 많은 큰 동서한테도 칭찬받고 살았는데 이장네 집안일 정도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이런 우리 부부를 이장네 집에서는 무시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대해 줬는데 남편을 만난 기쁨도 잠시 타관살이의 서러움을 받아야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아들은 무엇을 느꼈는지 주인집 아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바보처럼 실실 웃으며 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뿐만이 아니었다. 비록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지만 내 나이는 고작 25살이며 얼굴도 예쁘장하게 생겨서 그랬나 마을 총각들이 나만 보면 놀리기 시작했다. 타관에 가면 본래 살고 있던 토박이가 텃세를 부린다는 데 그런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못 들은 체하며 상대를 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 말썽이라도 생기면 숨어 사는 남편에게 해가 있을까 봐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은 무슨 일이 있었나 일을 하고 늦게 들어와 화를 단단히 냈다. 남편은 평소 말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화가 나면 무서웠다. 어쩌다 큰아들이 잘못하면 어디서 배웠는지 옷을 홀랑 벗겨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회초리로 때려 아들을 반 잡는 성격이었다. 그런 성격이다 보니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아버지 눈치만 살피며 살았었다. 그런 남편이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내가 꼬리를 치니까 동네 청년들이 나를 놀린다며 얼마나 때렸는지 그의 주먹과 발길질로 온몸에 멍이 시퍼렇게 들도록 얻어맞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억울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으며 살았었다. 시골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까불 줄만 알고 살아온 사람이 남의 마을에 들어와 숨어서 일해 주고 살려니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에 참고 또 참으며 살았다. 남편이 언젠가는 내 마음을 알아줄 날이 올 것이란 생각으로 참으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다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갈 때 우리 부부는 다시 갈등에 싸였다. 우리보다 생활이 넉넉한 사람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남의집살이하는 가난뱅이가 아들을 중학교에 보낸다고 흉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는 몇 날을 갈등하다 원서를 냈다고 다 중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들에게 일단 원서를 내보라고 했다. 원서를 낸 학생 중에서 반은 입학시험에 떨어져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아들이 원서를 냈어도 합격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우리 두 부부는 아들이 공부를 얼마나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딱 합격했다. 우리 동네에서 8명이 입학시험을 보아 4명이 합격했는데 그중 한 명이 내 아들이었다. 우리는 기쁨보다 고민이 더 많았으나 우선 친정에 가서 입학금을 빌려다 중학교에 보내줬다. 그리고 아이가 중학교에 가면서 우리 집에 운이 들어온 것인지 이장네 집에서 배냇소도 한 마리 줘서 키우게 되었다.
그러다 고향에 있는 집을 팔아 마루도 없고 방 2개와 부엌만 있는 새로 지은 초가삼간 집을 장만했다. 이 집에 이사 올 때쯤은 배냇소도 어미가 되어 새끼를 낳아 정식 우리 소가 생겼으며 고향에 있는 부모가 물려준 자갈밭 전답을 모두 팔아 작은 산도 하나 사고 논과 밭도 장만했다. 이제는 남의 집 일을 하러 가는 것보다 일군을 데려다 우리 집 일을 시키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내 집이 생기자, 우리 집 살림도 달라졌다. 내가 이 마을에 이사 와서 3년도 채 되기 전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시골의 이집 저집을 찾아다니며 박물 장수도 해 봤고,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두부 장수를 했는데 콩 끓인 물과 두부 만들면서 나온 비지를 소에게 먹이는 등 억척을 부리며 살아서 그런지 돈이 조금씩 모아져 전답도 제법 장만하게 되었다.
새집으로 이사 온 우리는 수입이 많은 인삼 재배와 참외 농사 등 열심히 살았는데 자연재해를 피해 가지 못하고 끔찍한 흉년을 당한 적도 있었다. 지금 기억에 군사혁명이 난 이듬해로 기억된다. 새로 장만한 천수답 1,000여 평에 첫 농사를 지었는데 가뭄과 도열병으로 싸라기 몇 말만 수학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큰아들은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다 수업료를 내지 못해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식량이 없는 우리 가족은 내가 산에서 따온 도토리로 밥해 먹으며 그해 겨울을 넘기고, 봄에는 논에 난 둑새풀 씨를 훑어다 볶아 먹으며 한 해를 넘겼다.
그러다 남편이 우마차를 끌면서 살림이 점점 불어났다. 우마차는 수입이 제법 많았으나 너무 힘들어 2년 정도 끌다 소를 팔고, 다시 특용 작물인 담배를 재배했는데 수입이 좋아 살림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그때 큰아들이 다시 고등학교에 가고자 해서 보내 줬다. 그러는 사이 나는 아이를 계속 낳아 4남 3녀로 7남매나 두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자식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우리 부부가 얼마나 멍청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난 속에서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치며 살았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내가 힘들었던 것보다도 자식들이 더 불쌍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또 한나절이 지나간 모양이다. 요양사가 죽을 가져와 먹여주고 양치질을 해 준 다음 나갔다. 점심을 먹고 약에 취해서 그런지 살짝 잠이 들라고 하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어머니 주무세요.”
“정순이 어르신 큰아들 왔어요.” 하는 소리에 눈을 뜨고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요양 보호사는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큰아들님과 며느님이 오셨는데” 하며 웃고 있었다. 나는 반가워
“바쁜데 어떻게 왔어.”라고 빈말 인사를 했다.
아들의 머리가 검은색으로 변하여 처음에는 몰라봤다. 분명 내 큰아들은 머리가 하얀 백발인데 검게 변한 것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완전 백발이라 그가 왔다 간 후 머리맡에 있는 수다쟁이 여편네가 아들이 돌아간 다음 영감이냐고 물어 와 대답을 안 해 줬는데 염색을 한 모양이다. 아들 나이도 70 중반쯤 되었으니, 머리가 흴 때도 되었지만 저희 아버지 닮아서 그런지 아니면 객지에 나가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머리가 일찍 시었다. 며느리가 손을 꼭 잡아주면서
“권아, 할머니야 할머니, 인사해야지” 하자
“안녕하세요.” 발음도 부정확하게 인사를 해서 쳐다보니 손자도 와 있다. 이 손자가 큰아들 가슴을 멍들게 하는 아들이다. 무슨 병인지 태어나면서부터 잘못되어 정신 발달장애로 태어난 모양이다.
“할머니 손 한 번 잡어 봐” 하자 녀석은 저희 어미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내 손을 잡아주는데 젊어서 그런지 제 어미 손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들은 선체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요양 보호사가 어디서 의자를 하나 더 가져다 놓으면서 아들에게 앉으라고 권하자, 아들은
“괜찮은데?” 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도 제 아들과 같이 내 손을 잡아주며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그는 내가 요양원에 왔을 때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더니 이제는 두 달에 한 번씩 꼭 찾아오고 있다. 내가 요양원에 온 지가 몇 년이 되었는지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이제는 누가 오고 가는 것도 별로 관심이 없다.
큰딸과 같이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생각은 며칠만 있으면 가는 줄 알았었다. 영감이 죽고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다 막내아들이 살던 집에서 큰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아래층에 있는 주간 보호센터에 다녔는데 어느 날 갑자기 큰딸이
“엄마, 엄마도 이제 힘들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이제 이곳에서 주간 보호센터에 다녀” 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고 들어왔는데 이곳이 내 집이 되는 줄은 몰랐었다.
영감이 살아 있을 때 큰아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이었는지 천안 변두리에 조그마한 밭이 있는 집을 하나 장만해 놓고 우리 부부를 구경시켜 주면서 저와 살기가 거북하면 이곳으로 옮겨와 텃밭을 가꾸며 살라고 권하는데 나도 싫었지만, 영감이 사는 집에서 절대 떠나지 않는다고 하여 가지 않았었다.
영감이 죽은 후 큰아들 집에서 지내는 첫 제사에 참석하여 며칠간 머물고 있는데 어느 날 나를 차에 태우고 대전에 있는 한적한 도로로 다니면서 저와 같이 살자고 말했다. 그때 나는 절대로 너와 같이 안 산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랬더니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엄마는 큰아들 고집을 잘 모르는가 봐” 했다. 내가 알기로는 제가 고집은 무슨 고집이 있어. 제 동생만 하려면 어림도 없는데,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 아들 하는 말이
“엄마는 철이 만 고집이 센지 알지, 내가 고집이 더 센데” 했다.
“야~, 네가 어떻게 철이 고집보다 세”라고 대답하며 자동차 창밖으로 지나가는 나무를 쳐다봤다.
철은 둘째 아들이다. 이 녀석은 얼마나 고집이 센지 중학교도 겨우 졸업하고 그렇게 고등학교에 가라고 하는데도 끝까지 가지 않고 일만 했다. 그리고 장가갈 나이가 지났는데도 장가를 가지 않는다고 하여 혹시 고자가 아닌가? 하여, 큰아들한테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확인 한번 해 보라고까지 했는데 알고 보니 중학교만 나온 녀석이 여자는 고등학교 정도는 나온 여자라야 결혼한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었단다. 우리 집 주변에는 시골이라 고등학교를 나온 여자는 그만두고 중학교 나온 여자도 드물었다. 이것을 안 큰아들 부부는 저희가 중신한다더니 정말로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참한 색시를 중매했다.
둘째 며느리는 어느 날 큰 며느리가 자기 시동생 이야기를 하면서 참하게 생겼으니 결혼 한 번 할 의향이 없냐고 물어 와, 형이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으니까, 동생도 당연히 고등학교 이상은 나왔을 것으로 생각하고 결혼을 승낙했단다. 그러나 뒤에 알고 보니 이렇게 시작된 혼사는 단순히 큰 며느리 말만 믿고 결혼한 것은 아니었다. 혼삿말이 오고 갈 때 신부 측 큰 오빠가 우리 마을에 와서 여러 사람을 붙잡고 둘째 아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만나는 사람마다
“아~, 그 사람은 한겨울에 옷을 홀랑 벗겨 내쫓아도 살 사람이에요.”라고 대답하더란다. 그래서 결혼했더니 중학교뿐이 안 나왔다고 처음에는 불평했지만 야무진 둘째 아들의 생활 능력과 고집은 꺾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 아들을 큰아들이 제가 고집이 더 세다고 하니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사실 내가 큰아들 집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큰아들과 며느리가 장애인 아들을 키우면서부터 우리 집에 발걸음이 뜸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아이를 키우는 아들 부부가 얼마나 힘들며 가슴 아플까? 하는 생각에 나까지 그들에게 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눈빛 속에 내가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가득해 보였으며 아들로서 어찌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젖어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것을 본 나는 절로 서글퍼져 그만 돌아갔으면 하는데 그는 내 손을 다독거리며
“어머니 이제 한숨 주무세요. 다음에 또 올게요.” 하면서
“권아, 할머니에게 인사해” 하자 손자 녀석은
“안녕하세요.” 한다.
그는 ‘안녕하세요.’와 ‘안녕히 계세요’가 구분이 안 되는 모양이다. 돌아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 아들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던가? 생각하면서 장애아들을 데리고 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들 가족이 왔다 가서 그런지 큰아들이 학교 다닐 때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초등학교 다닐 때 책을 찢어 딱지를 만들었다고 저희 아버지한테 홀랑 벗겨진 채 회초리 맛 던 모습, 어느 날인가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쫓겨나 밤이 깊도록 들어오지 못하는 아들을 자정 무렵 남편이 잠든 다음 헛간 한쪽 구석에서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자는 아들을 깨워 데리고 들어왔던 기억, 중학교 1학년 때 제 동생과 소여물을 쓸다가 작두에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잘려 나갈 뻔했던 일, 고등학교에 다니다 수업료를 내지 못해 학교서 쫓겨나 몇 해 동안 여름에는 농사일을 거들고 겨울에는 나무를 해 오는데 고집스럽게도 어머니 때기 좋은 나무라며 싸리나무와 삭정이만 해 오던 모습, 대학에 가겠다고 고집부리며 저 혼자 산속 인삼밭 다락방에서 보리밥을 해 먹으며 한 해를 버티던 모습들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지나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랑스러웠던 기억은 어느 날인가 우체부 아저씨가 편지 한 통을 주면서
“동이가 누구예요. 대통령한테 편지가 다 오게?” 하면서 전해 준 편지는 청와대에서 보낸 편지라고 하면서 주고 갔다.
이런 큰아들이 대학에 다녀서 그런지 바로 밑에 있는 둘째만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밑의 동생들은 오빠와 형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모르지만 마을의 다른 집 자녀들과 달리 학교 가기를 원했다. 잘사는 집 아이는 상급학교에 가려도 입학시험에 떨어져 못 가는데 우리 애들은 신기하게도 모두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4명은 대학까지 나오고, 또 2명은 고등학교까지 나왔다.
그러다 보니 우리 부부는 밤과 낫이 없이 인삼 재배는 물로 수박, 참외, 담배, 포도, 복숭아 등 수입이 많다면 안 해 본 것이 없이 다 해봤다. 그런 억척같은 일을 하는데 같이 도와준 자식이 둘째 아들이다.
둘째 며느리는 처녀 때 사업을 했다더니 사람 다스리는 데 수완이 좋았나 억척인 저희 서방과 같이 재산도 쾌나 모았으며 남편은 국궁협회 회장이고 저는 라이온스클럽 회장이라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아들 공부도 잘 시켜 큰아들은 서른 살도 되기 전에 박사가 되어 서울에 있는 유명한 대학 교수가 되었다고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경사라며 큰길가에 플래카드를 걸어 주면서 나보고 복을 받아 회장님 부모가 되었다고 칭찬했었다.
둘째 아들 내외 생각에 마음이 흐뭇해지는데 갑자기 셋째아들이 떠 올랐다. 셋째는 착해서 그랬나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제 형제 중 공부를 제일 잘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데 대학에 다니고 있던 큰아들이 고등학교는 가능한 도시의 좋은 학교에 다녀야 한다면서 데리고 가 일찍 내 품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 아들은 형의 덕인지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이 되어 서울에 있는 중앙부처에서 근무한다는데 바빠서 그런지 명절 때나 볼 수가 있었다. 그 아들은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갑자기 그 아들 가족들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생각이 막내아들로 옮겨 갔다. 이 녀석은 재능이 좋은가 무슨 일이든 하는 것만 보면 저희 형들보다 야무지게 잘하는데 타고난 복이 없나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도 두 번씩이나 했으면서 모두 헤어지고 두 번째 여자에게서 난 아들 하나만 데리고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미 가슴을 아프게 했다.
막내아들 생각에 한이 서리는데 벌써 저녁때가 되었나 보다. 또 죽 반 공기가 들어와 먹고 약을 먹은 다음 침대를 일으켜 세운 체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해가 지려는지 창 넘어 가물가물 보이는 산 능선 봉우리가 붉게 물이 들었다.
오늘 하루도 저무는 모양이다. 이런 날이 얼마나 지나가야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 목숨이 질기기도 한 모양이다. 내 나이 50도 못 돼서 죽는 줄 알았는데 90이 넘었으니 이 정도 살았으면 원도 한도 없이 살았는데 무슨 미련이 남아서 죽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저녁 먹으면서 먹은 약에 취했나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을 잤나 모른다. 침실에 불은 작은 불 하나면 켜져 있고 요양원 전체가 조용하다. 모두 다 잠이 들었나 보다. 요양사가 깜박했나 창문의 커튼이 열려 있는 대로 있다. 창밖에 보름달이 둥그렇게 비치고 있다. 꼭 나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보름달을 쳐다보다 문득 큰 손녀딸이 떠오른다. 참 예쁘기도 했는데. 그 녀석 생일이 팔월 대보름날이었다. 그러자 내 생일이 떠오른다. 나는 정월 열나흘이다. 그러다 보니 설날이 지난 지도 얼마 안 되고 다음 날이 정월 대보름날이라 어려서부터 생일 밥 한 번 제대로 못 얻어먹었는데 늙어가면서 며느리가 생기자 꼬박꼬박 차자와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그러다 영감이 죽은 후는 살며시 없어져 버렸다. 아마 움직이지도 못하는 어미 생일 파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영감이 죽으면 나도 곧 죽을 줄 알았는데 벌써 십 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다. 영감이 나를 싫어해서 그런가, 십 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도 데려가지 않는다. 내가 자기한테 얼마나 잘해 주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다 보니 달도 기우는지 창문 한쪽 구석에 반쯤 가려 비치고 있다. 나도 저 달과 같이 이제는 가야 하는데 하면서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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